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과 그림자밟기 놀이를 자주 했습니다. 술래를 정하고 그림자를 밟히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놀이입니다. 술래에게 그림자를 밟히지 않기 위해 태양을 등지고 달리기도 하고 태양을 향해 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림자를 떼어내 어딘가에 감출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그림자는 고양이나 강아지의 꼬리처럼 어떤 경우에도 우리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태양이 있는 동안 지상의 모든 사물은 그림자를 거느립니다. 태양을 볼 수 없는 날, 어둠이 내린 뒤에는 그림자를 볼 수 없습니다. 내 그림자보다 더 큰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도 그림자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런저런 특성으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그림자는 왠지 모르게 슬픈 분신처럼 느껴졌습니다. 백주의 세상에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어둠, 그것이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깊은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림자는 왜 생길까.
어른이 되고 더 이상 그림자밟기 놀이를 하지 않게 된 뒤에 비로소 깨칠 수 있었습니다. 태양빛을 통과시키지 못하는 모든 것은 그림자를 갖는다는 사실. 빛을 차단하고 빛을 가로막기 때문에 그림자가 생긴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요컨대 사물이나 인간의 경직성이 그림자 발생의 근원입니다. 구름도 그림자가 있고 물도 그림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공기에는 그림자가 없습니다. 공기의 흐름인 바람에도 그림자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분명하게 있지만 보이지도 않고 그림자도 없는 것입니다.
그림자를 볼 때마다 공기를 생각하고 바람을 생각합니다. 공기처럼 없어서는 안 될 존재, 바람처럼 거침없고 유연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처럼 그림자밟기 놀이를 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진종일 남의 그림자를 밟으며 살아갑니다. 남도 나의 그림자를 밟고 나도 남의 그림자를 밟습니다. 누가 술래인지 아닌지 분간도 할 수 없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그림자를 밟히면 너무 안타까워했는데 이제는 날마다 남의 그림자를 밟으면서도 무감각하게 살아갑니다.
그림자가 없는 세상을 상상합니다. 모두가 유연해지고 투명해져서 세상의 모든 빛을 다 통과사키고 스스로 빛나는 존재들을 상상합니다. 너와 나, 나와 남의 분간이 없는 온전한 빛의 세상은 그림자 세상의 이면입니다. 그렇게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 불가능한 영역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바로 이곳의 반대쪽에 그곳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곳에 이르지 못하는 건 경직되고 경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태양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정수리 위에서 빛날 때 그림자도 가장 짧아집니다.
해질 무렵,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서글퍼집니다. 이 경직된 심신, 언제나 그림자가 스러져 공기처럼 바람처럼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그림자를 볼 때마다 빛에게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빛을 통과시키지 못하는 존재의 경직성, ‘마음의 벽’이라는 말이 실체처럼 느껴져 그림자가 더욱 무겁게 보입니다.
박상우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