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용호 국세청장이 14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 국세청 본청에서 열린 전국세무관서장 회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백 청장은 이날 굳은 표정으로 단상에 올라 “이번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연합뉴스
■ 국세청 ‘백용호식 개혁’ 시동
인사권 지방청에 대폭 위임… ‘표적 조사’ 논란 해소 위해 조사 시기-대상 기준 명확히
白청장 “마지막 기회” 경고
시작땐 박수… 연설후 서늘
백용호 국세청장은 14일 취임 이후 처음 열린 전국세무관서장 회의에서 국세청을 향한 질책과 자성으로 인사말을 시작했다. 그는 “각계 인사들을 만나 보니 국세청의 신뢰가 무너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의 위기는 일부 간부의 일탈행위에서 비롯된 것” “외부에서 개혁안이 논의된 것 자체가 우리가 잘못했기 때문”이라는 쓴소리를 쏟아냈다. 회의 분위기는 금세 얼어붙은 듯 바뀌었다.
백 청장이 단상에 오를 때 큰 박수가 터졌던 것과 달리 5분간의 인사말을 마치고 내려올 때는 참석자들이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이후 비공개 회의에서도 간부들에 대한 질책을 이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국세청의 한 간부는 “백 청장의 말을 들으면서 숨이 멎는 듯했다”며 “이번에 제대로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지막 경고로 들렸다”고 말했다.
백 청장이 일선 세무서장들과의 상견례를 통렬한 비판으로 시작한 것은 전직 청장들의 잇단 불명예 퇴진으로 추락한 국세청의 위상을 바로 세우려면 뼈를 깎는 자기혁신을 통한 국민의 신뢰 회복이 필수라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 세무조사 예측 가능성 높여
이날 발표된 국세행정 변화 방안에는 국세청 권력의 핵심인 ‘세무조사’의 대대적인 개혁안이 포함됐다. 국세청은 우선 세무조사 시기와 대상 선정의 기준을 명확히 규정해 국세 행정의 예측 가능성을 높였다. 세무조사에 나설 때마다 ‘표적 조사’라는 식의 뒷말이 나오는 소지를 없애겠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9월부터 대기업에는 4년 주기 순환조사가 도입된다. 그동안 국세청은 조세채권 소멸시효가 5년인 점을 고려해 원칙적으로 5년마다 정기조사를 실시하되 필요에 따라 세무조사 시기를 조절해왔다. 따라서 ‘4년 주기’를 분명히 한 것은 진일보한 조치라는 평가를 받는다.
지방국세청은 세무조사권의 남용을 막기 위해 조사 관리부서와 집행부서를 분리하기로 했다. 2010년 초부터 관리부서는 세무조사를 위한 계획수립, 대상선정, 진행관리, 성과분석, 고객평가 같은 지원 업무만 맡게 된다. 집행부서는 산업별로 전문화, 특성화해 실지 조사 업무만 수행한다.
○ 국세청 독자 개혁안 제시
국세청 측은 효율적인 세정업무 유지와 국세청 쇄신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 고심 끝에 이번 개혁안을 만들어냈다고 설명했다. 청와대 태스크포스(TF)팀이 마련한 지방청 폐지, 일선 세무서 통폐합 등 강도 높은 조직 개편안은 최종안에 포함되지 않았다. 국세청 관계자는 “백 청장이 청와대 TF팀의 제안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은 것은 전직 청장들의 불명예 퇴진으로 촉발된 국세청 위기와 조직 축소는 인과관계가 낮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그 대신 백 청장은 국세청 위기의 근본적 원인을 △공정하지 못한 인사 △정치적 목적 개입 등 세무조사에 대한 오해 △직원들의 도덕성 및 청렴성 부족 등으로 진단하고 각각에 대한 해결방안을 내놓았다. 요란한 조직개편보다는 내부에서부터 차근차근 변화시켜 나가겠다는 실천 가능성에 무게를 실은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하면 세무행정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지를 놓고 많은 고민을 했다”고 말했다.
○ 인사와 감찰의 자율성 확대
백 청장은 청장 등 본청 고위직 간부들에게 집중된 과도한 권한이 부정부패와 줄서기 같은 고질적인 병폐의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사실상 청장이 독점한 인사권을 지방청장에게 대폭 넘기고 인사위원회를 신설해 청장의 독단적 인사권 행사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국세청의 핵심 요직 중 하나인 감사관을 외부에서 영입하기로 한 것도 국세청 내부에서는 큰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국세청 감사과는 그동안 ‘감피아’라고 불릴 정도로 국세청 내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국세청 안팎에서는 독립성이 보장된 임기제 감사관이 임용되면 고위직 간부들에 대한 강도 높은 감찰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 신설되는 납세자보호관에게는 납세자의 권리 침해가 중대하다고 인정되면 세무조사를 일시 중지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아울러 세무조사 권한 남용을 발견하면 조사반 교체와 해당 직원 징계 등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실질적인 견제장치도 마련했다. 국세청 관계자는 “납세자보호관은 지방청과 세무서의 납세자보호담당관을 직접 지휘 통솔하게 된다”며 “임기제 외부인사인 만큼 독립성과 강화된 권한을 갖고 국세청 내부 논리보다는 납세자의 입장을 대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