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로 얻은 행복, 비교로 깨진다
TV에서 어려운 이웃의 모습이 감정을 자극하는 배경음악과 함께 나올 때 대부분의 사람은 ‘안됐다’ ‘불쌍하다’며 혀를 쯧쯧 차게 된다. 도와주고 싶어져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왠지 모를 위안을 느끼며 저절로 내 삶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저 인생보다는 나으니까 행복하다’고 말이다.
내 책을 읽거나 강연을 듣고 보내오는 반응 중 ‘나는 저 사람보다 건강해서 저런 고통을 겪지 않았으니 감사하다’는 깨달음은 별로 반갑지 않다. 자신이 처한 상황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과 비교해서 얻는 감사는 결코 오래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복은 마치 일시적인 진통제와 같다. 당시에 나를 잠시 잠깐 위로해 줄지는 모르지만 결코 내 삶을 이끌어갈 힘이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에 나보다 잘난 이는 얼마든지 있으므로 비교로 얻은 감사는 얼마든지 나를 불행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엄친딸’ ‘엄친아’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그 말이 순식간에 범국민적 공감을 얻은 데에는 누구나 공부 잘하는 엄마친구 아들딸과의 비교로 인해 슬펐던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그 속에서 나보다 덜 가진 이를 보며 값싼 우월감을 느끼고 나보다 더 가진 이를 부러워하며 나 자신을 상처 입히지는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9년 전 사고로 중환자실에서 생의 고비를 넘기고 일반병실로 옮겨졌을 때는 의약분업으로 의료파업이 한창이었다. 누구보다 수술이 절실한 환자였지만 기약은 없고 3시간 동안 고통에서 풀어주는 진통제 세 대로 하루를 버텨나가고 있을 때 내가 살 길은 어떻게 해서든지 감사할 거리를 찾는 것이었다.
피부이식을 받지 못한 얼굴에서는 하루 종일 진물이 흘러나왔고 속피부가 당겨져 7개월 동안 눈도 감기지 않았으며 이식한 피부마저 약해져 녹아내릴 때 나는 그래도 감사할 일을 찾았다. 남들과 비교하면 불행 중 불행인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열심히 찾다보니 감사할 일이 보였다. 걸어서 처음 화장실에 간 것, 환자복 단춧구멍에 단추를 끼울 수 있었던 것, 짧아진 손가락으로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것, 살아 있어서 가족과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 오늘 감사거리가 있었던 것처럼 내일 또 다른 감사거리를 찾을 수 있을 테니 또 감사했다.
나보다 더 아픈 사람들과 비교해 얻어진 감사가 아니었다. 사고 없이 잘 살고 있는 친구들과 비교하며 불행해하지도 않았다. 그런 감사들은 진통제가 결코 줄 수 없었던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었고 다른 사람이 나를 보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다.
나는 감사와 행복이 좀 더 근본적인 것에서 시작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들과의 비교로 얻어진 상대적 행복이 아닌, 절대적인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잃은 것보다는 내게 남겨진 것, 남이 못 가진 것이 아닌 내게 주어진 것에 감사할 때 진정한 행복이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이지선 푸르메재단홍보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