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전통적으로 분쟁과 정복의 역사와 의회민주주의 및 인문학적 전통,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시대의 바보들’로 구성된 철학가, 피아니스트, 화가, 전문경영인, 작가, 변호사, 의사, 나무박사, 인기블로거, 교사, 음식연구가, 중·고·대학생 등 30명은 대중들에 의해 이미 많이 소개되고, 소비된 관광대국의 모습보다는 영국의 진정한 풍취와 아름다움, 그리고 영국인의 진면목을 보여줄 수 있는 ‘작고 아름다운 마을’을 집중 탐방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아름다운 마을 만들기’ 캠페인을 벌여 온 미래상상연구소 측이 현지답사를 하는 등 치밀한 기획 끝에 8월 초 열흘간 영국 땅을 밟았다. 일행을 안내한 15년 영국 체류 경력의 현지 가이드는 “도대체 누가 이런 일정을 짰느냐. 앞으로 10년은 더 지나야 가능한 일정”이라며 경탄을 금치 못했다.
영국에 도착한 즉시 가이드 김형덕 씨(39)에게 물었다. “가장 영국적인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잠시 망설이던 그는 “전원(田園)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내심 여왕 셰익스피어 해리포터 비틀스 축구 테니스 의회민주주의 같은 것들을 생각했던 나는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높고 낮은 구릉(잉글랜드)과 산악지대(스코틀랜드)를 가릴 것 없이 푸른 초원이 국토를 덮고 있었고, 어느 호텔과 가정집을 가도 갖은 정성을 들인 정원이 싱싱하게 살아 있었다. 산림과학원에서 40년간 나무와 함께 살아온 정헌관 박사조차 이름을 잘 모르는 화초가 있어 난감한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화가인 김병종 서울대 미대 교수는 “과거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다양한 미술사조가 발달한 데 비해 영국은 풍경화 외에 이렇다 할 화가나 미술세계가 없었던 것이 평소의 의문이었다”면서 “여기 와서 보니 이런 압도적 대자연 앞에서 화가의 상상력이 부질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 점에서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이자 모든 이를 감탄케 했던 곳은 코츠월드 지역의 작고 아름다운 전원마을인 바이버리와 일행이 묵었던 ‘백조호텔’. 영국인들이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자, 제일 가고 싶어 하는 마을로 손꼽는 곳이다. 17세기 때 지어진 석조 건물로 방이 22개뿐인 호텔은 항상 6개월 치 이상 예약이 밀려 있는 곳. 하지만 미래상상연구소 측이 지난겨울 현지까지 찾아가 사전 예약금을 지불한 끝에 우리 일행이 방을 모두 차지했다. 동네 일원을 내셔널 트러스트에서 수시로 보수·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열쇠를 받고 방에 들어서자 오밀조밀한 방 구조와 내부 장식이 감탄을 자아낸다. 방 이름은 물론 실내장식과 욕실 구조도 각기 다르다. 짐을 풀기도 전에 상대편 방을 둘러보느라고 난리다. 나그네를 이렇게 행복하게 만드는 호텔은 처음이다. 위대한 인물이나 예술가의 출생지가 아니고, 박물관이나 기념관이 없더라도 얼마든지 최상의 만족을 주는 여행지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여행객들을 부럽게 했다. 거리를 아무리 살펴봐도 노점상은 없었고, 사람들을 호객하는 울긋불긋하거나 대문짝만 한 간판도 물론 없었다.
관광지 개발이라고 하면 늘 거창하고 화려한 것만을 생각해왔던 일행은 마을을 감싸고 도는 1km가량의 산책길과 조촐한 송어양식장, 차고 맑은 시냇물 속 깨끗한 수초 사이를 유유자적 헤엄쳐 다니는 백조, 오리, 송어를 보고 동화 속의 나라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물에서 자란 송어와, 인근 마을에서 채취한 버섯 오렌지 밀크 토마토 꿀 등으로 저녁과 다음 날 아침을 먹었다. 박혜경 자하손만두 대표 등 음식연구가 세 사람은 “어쩌면 시골의 이런 작은 호텔에서 이렇게 신선하고 정성이 담긴 음식을 손님들에게 내놓을 수 있느냐”며 놀라워했다.
이상문학상 수상작가인 정미경 씨는 “인간의 상상력을 최대한 억제하면서 자연을 겸손히 존중하는 것이 진정한 미의식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한국 정책 담당자와 지역 주민들이 꼭 참고해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왜 국내 유명 여행지에는 한국의 전통과 문화적 품격을 잘 보여주는 숙소가 없는가? 또 아침엔 왜 계절과 산지의 특성을 살리지 못한 갈비탕 해장국 된장국 순두부 등의 획일적인 음식만을 먹어야 하는가? 개인적으로는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 방문 후 진행된 안동 하회마을의 사려 깊지 못한 개발에 실망해 두 번 다시 그곳을 찾아가지 않았다. 우리 장관과 국회의원, 단체장들은 도대체 어디로 관광 시찰을 가서, 무엇을 보고 돌아와, 무슨 정책을 수립하는지 궁금하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조촐한 자연미 물씬
다음 날 일행은 인근 버튼온더워터로 향했다. 은퇴자들이 선호하는 이 지역은 ‘코츠 월드의 베네치아’로 불리는 곳으로 마을 한가운데로 얕은 시냇물이 흐른다. 얼핏 청계천을 연상케 하지만 훨씬 환경친화적이고 물살도 세지 않다. 산책객이 많이 들리는 곳 중의 하나가 그 이름도 재미난 ‘스몰 토크 티 룸(Small Talk Tea Room).’ 동네를 감싸는 측백나무 담장과 돌담도 그림처럼 아름답다. ‘결코 과(過)하지 않은 자연미’가 주는 감동이라고나 할까.
호수의 경치가 빼어난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그라스미어에서 머문 ‘인 온 더 레이크’ 호텔은 무척 고풍스러운 분위기. 60대 인기 블로거 노경식 씨는 카메라를 네 대나 들고 다니며 창문 하나, 풀 한 포기, 산과 호수의 근경과 원경을 각기 다른 카메라에 담는다. 한밤중에 보름달이 환하게 뜬 초원에 나와 잔디를 밟으니 풀 냄새가 향긋하다 못해 달다. 인근에서 창작 활동을 한 낭만파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도 200여 년 전 바로 이 달을 보고 시상을 가다듬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제주도에서 오신 화가와 명상가는 이 일대의 기운이 대단하다며 다음 날 일정에서 빠져 하루 종일 호텔 인근에서 심신을 충전했다. 인생과 여행은 운명과 일정을 따라 무조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추고 쉬면서 재충전도 해야 하는 것을 몸소 보여준 것이다.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인물은 자신의 인세로 이 지역을 후대인들에게 무상으로 전해 준 작가 비어트릭스 포터. 그녀는 ‘피터 래빗’ 시리즈 인세로 레이크 디스트릭스에 있는 매각 농장을 사들이기 시작하면서 자연보호운동에도 적극 가담한다. 또 무분별한 땅 개발에 반대하며 농장과 저택 등이 경매에 부쳐질 때마다 달려가 사들인다. 그 결과 그녀는 77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여의도 면적의 5.5배에 이르는 땅을 내셔널 트러스트에 기증하게 된다. 오늘날 레이크 디스트릭트가 100년 전이나 다름없는 천혜의 풍경을 유지하면서 많은 문화 예술인들과 순례자를 불러들이는 것은 오롯이 포터의 덕분이다. 법무법인 태평양 대표인 황의인 변호사는 “여유 있는 사람들의 문화 예술 사랑과 후원이 많은 사람들을 진정 기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영화 ‘브레이브하트’에 등장하는 스코틀랜드 초입의 대협곡 글렌코의 웅장함과 신비로움도 나그네들의 걸음을 여러 번 멈추게 한다. 영국인에 점령당한 스코틀랜드인들의 한이 아직 서려 있어서일까. 계곡을 들어서는 순간 한 줄기 소낙비가 차창을 때린다. 사형대에서 목숨을 구걸하는 대신 “프리덤”을 외치며 목이 잘려 나간 윌리엄 월리스의 함성이 저 먼 계곡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참석자들은 “자연과 관광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을 바꿔야 할 때가 됐다. 크고 거창하고 막대한 사업비를 투자해 자연을 훼손하며 대형 인공 조형물을 만들기보다는, 인간이 자연 앞에 드러나지 않으면서 자연을 빛나게 해주는 역할을 해야 할 때가 됐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공연예술의 성지로 국가브랜드 높이는 ‘에든버러 축제’
매년 8월 스코틀랜드 행정 문화의 중심인 에든버러에는 2만여 명에 가까운 세계 각국 공연 예술가들이 찾아온다. 프랑스 칸이 5월 세계 영화의 수도이듯, 8월 영국 에든버러는 세계 공연 예술의 메카가 되는 것이다. 또 프로듀서 기자 등도 찾아와 작품과 신인 발굴에 나선다. ‘난타’와 ‘점프’가 세계의 무대에 초청받게 된 것도 이곳에서 뜨거운 호응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 기간 중 무려 250만여 명의 관람객이 에든버러를 찾아오고, 어린이들을 위한 각종 공연, 코미디, 댄스, 음악, 마임, 전시, 이벤트, 뮤지컬, 연극 등 2000여 편이 다양한 공연장과 거리에서 공연된다. 특히 인기를 끄는 것은 에든버러 성 중심가인 로열 마일 1km 지역에서 자유분방하게 진행되는 프린지(Fringe) 공연. 프린지는 1947년 정식 축제에 초대받지 못한 8개 팀으로 시작했으며, 그 취지에 따라 어떠한 공식 초청은 물론 심사도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공연을 구경해 달라는 참가자들의 각종 홍보 행위도 눈요깃거리다. 지난 주말 로열 마일 한복판. 500여 명의 관객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인디아나 존스’를 흉내 내며 불 채찍을 휘두르는 젊은이의 재담과 묘기에 환성과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애리조나 존스’로 자칭했다.
길을 따라 내려가 보니 접시 돌리기, 희귀 악기 연주, 팬터마임, 서커스, 합창, 행위 예술 등 수많은 공연이 차례로 펼쳐진다. ‘맘마미아’와 ‘아가씨와 건달들’ ‘게이쇼’를 즉석 홍보하는 그룹도 있었다. 붉은 루주를 입에 바른 ‘훈남’이 ‘프리 키스’ 표지를 내걸고 청춘남녀들과 맘껏 키스를 나누는 풍경과도 마주쳤다. 전혀 추하거나 어색하지 않아 보인다.
때마침 공연 홍보 활동을 하고 있던 ‘극단 모시는 사람들’ 단원들을 만났다. 30명가량이 지난해의 ‘몽연’ 공연과 함께 아동극 ‘강아지 똥’을 영어로 공연하는데, 반응이 좋아 갈수록 관객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후반부에는 5, 6개 단체가 더 참가할 예정이다.
하지만 가장 인기가 높은 것은 오후 10시 반 유서 깊은 윈저 성을 스크린 삼아 펼쳐지는 ‘밀리터리 타투’. 매번 9000석의 스탠드 좌석이 모두 찰 정도로 인기고, 예매표도 일찌감치 동이 난다. 스코틀랜드 전통 의상에 백파이프와 드럼을 연주하는 군악대들의 퍼레이드에 이어 영연방을 중심으로 한 세계 각국의 밴드와 무용단의 공연이 밤 12시까지 이어진다. 연주 못지않게 에든버러 성채를 배경으로 비치는 각종 영상과 폭죽이 탄성을 자아낸다.
참가 군악대 전원의 현란한 개막 퍼레이드에 이어 영국 통가 스위스 호주 등 국가별로 공연이 이어졌다. 그러나 영국군의 아프가니스탄 전투 재현 장면은 아랍계 참가자들에게 불편한 마음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아 주최 측의 배려가 아쉬웠다. 또 영국군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에서 대항군이 한글이 새겨진 예비군복을 입고 있었던 것은 유감이었다. 시정을 위해 주최 측을 찾아갔으나 휴무 중이어서 귀국 후 영국문화원에 관련 사실을 통보해 엄중 항의토록 했다. 법무법인 태평양의 황의인 대표변호사는 귀국 일정을 늦춰서라도 시정을 받아낼 태세였다. 2부에서 일부 국가는 악기나 북채에서 광선이나 불을 뿜어내는 듯한 묘기를 선보여 큰 박수를 받았다. ‘헤이 주드’ ‘올드 랭 사인’ ‘고잉 홈’ ‘어메이징 그레이스’같이 익숙한 노래가 연주될 때는 많은 사람이 합창했다. 이처럼 ‘밀리터리 타투’는 군악대의 단순 합동 공연을 넘어 전 세계인의 가슴에 스며드는 추억과 화합의 축전이었다.
이번 여행의 좌장인 이명현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영국은 역사적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전통을 자랑해 온 제국이었으나, 다민족문화의 다양성과, 실험적인 문화축제를 끌어안음으로써 젊고 진취적인 영국의 새 국가 브랜드 이미지를 세계 속에 심어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바이버리·버튼온더워터·윈더미어·그라스미어·글렌코=오명철 전문기자 osc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