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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

입력 | 2009-08-25 14:06:00


"곧 죽을 목숨들이 참선이라도 하는 게야?"

원숭이 꼬리가 오른손으로 제 볼을 벅벅 긁어댔다. 역시 앨리스와 사라를 몰래 감시하였던 것이다. 앨리스가 피식 비웃었다.

"넷 중에서 셋이나 저 세상으로 갔군. 남은 하나는 무사할까?"

원숭이 꼬리가 제자리에서 한 바퀴 공중제비를 돈 후 양손으로 가슴을 쾅쾅 쳐댔다.

"보안청 네놈들만 없었으면 형님들도 무사하셨을 게야. 이게 다 네놈들 때문이니 먼저 이 세상 하직한다고 나를 원망 마라."

앨리스가 지지 않고 받아쳤다.

"말꼬리는 내가 직접 죽였으니 그렇다 쳐도, 소꼬리나 개꼬린 보안청과 무관해."

"무슨 소리야? 다 네놈들 짓이야. 다 네놈들 짓이야."

원숭이 꼬리는 지능이 약간 떨어지는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소꼬리는 스스로 죽음을 택했지. 그게 너희들 반인반수족의 습성인가? 개꼬리는 무참히 살해되었고, 보안청 특수대는 진범을 잡기 위해 지금도 뛰고 있어. 헌데 우리 짓이라고? 웃기지 마."

그리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바꿨다.

"말해 봐. 형님들을 죽인 범인이 보안청 특수대라고 말한 녀석이 누구지?"

"말 못해. 말 못해. 말 할 수 없어."

원숭이 꼬리가 다시 반복했다.

"넌 속고 있어. 이 일만 끝나면 너도 죽음을 면치 못할 거야. 왜냐고? 넌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으니까. 너만 없애면, 네 명의 멍청한 반인반수족과의 관계는 영원히 사라질 테니까. 말해봐. 무슨 명령을 받았지?"

"말 못해. 말 못해."

"그럼 내가 맞춰 볼까? 남 앨리스 형사와 서사라 트레이너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지?"

원숭이 꼬리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음, 말 못해, 말 못해."

앨리스가 원숭이 꼬리의 잘려나간 꼬리를 쳐다보았다.

"말 안 해도 좋아. 하지만 이건 잘 알아둬. 보안청 형사를 살해한 자는 영원히 오염지대 지하 감옥에서 지내야 해. 평생 고통스런 윤리주입 프로그램(윤리적 판단을 담당하는 안와전두엽의 대뇌활동을 강화해주는 세뇌장치)에 갇혀 살아야 할지도 몰라. 감형은 꿈도 꾸지 마. 보안청 특수대 형사들이 얼마나 지독한지는 너도 소문을 들었겠지? 네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지구 끝까지 널 추격할 거야. 넌 평생 도망자 신세지. 몇 년 동안은 네게 명령한 이가 도움을 줄 수도 있어. 그러나 결국엔 넌 성가신 존재가 되고 말지. 그럼 넌 어느 낯선 도시 좁은 골목에서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할 게야. 어때, 그럴 듯 하지 않아?"

"……."

원숭이 꼬리는 즉답을 하지 않고 눈만 끔벅거렸다. 그리고 획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 침묵을 지키던 사라가 입을 열었다.

"왜 함부로 말하는 거죠? 저 녀석 약을 올려 우리가 득 볼 일이 뭐라고."

앨리스는 대답 대신 눈짓을 했다.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원숭이 꼬리만이 아니라 살해 명령을 내린 자까지 지켜보고 있으리라.

원숭이 꼬리가 이내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양손에는 희고 둥근 통이 들려 있었다. 그는 통을 열고 앨리스와 사라 주위에 내용물을 부었다. 기름이었다.

"네가 지금 얼마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지……."

원숭이 꼬리가 기름통을 내려놓고, 제 귀에 꽂았던 솜을 뽑았다가 다시 막았다. 무슨 소릴 지껄여도 듣지 않겠다는 뜻이다.

"미친 새끼!"

앨리스가 욕을 했지만, 원숭이 꼬리는 싱글벙글 웃으며 기름통을 끝까지 들이부은 다음 나가버렸다.

"확실하군요."

사라가 무릎을 꿇고 앉으며 말했다.

"뭐가 말입니까?"

앨리스가 원숭이 꼬리에게 놀림감이 된 것이 못내 억울한 듯 씩씩거렸다.

"결국 다 거짓이었어요."

쓸쓸한 웃음이 사라의 검은 볼을 어루만졌다.

"……최 볼테르, 그 사람이 명령을 내렸다고 보는 겁니까? 둘이……"

'사랑하는 사이 아닌가요?'란 문장을 맺지 못했다. 사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복수를 해야겠어요."

"뭐라고요?"

앨리스는 제 귀를 의심했다. 모든 걸 체념한 분위기를 풍기던 사라의 입에서 '복수' 두 글자가 흘러나온 것이다.

그때 펑! 소리와 함께 출입문이 부서지면서 불길이 밀려들었다. 통나무집과 함께 태워 죽이라는 것이 원숭이 꼬리에게 떨어진 마지막 명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