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회에서 하늘의 움직임을 살펴 역법을 제정하고 하늘의 이치를 살펴 농사에 필요한 시(時)와 때(날짜)를 알려주는 일은 국왕이 실천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였다. 세종시대에는 1432년부터 1438년까지 다양한 천문관측기기와 시계를 제작해 정밀한 천문시계 기술을 갖추게 된다. 당시에는 앙부일구 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를 비롯한 해시계와 해와 별로 시간을 알 수 있었던 일성정시의를 개발했다. 자동시보장치를 갖춘 자격루, 혼천의와 혼상이 물의 힘으로 운행하는 천문시계를 제작했다. 장영실이 세종을 위해 만든 옥루라는 물시계는 당시의 모든 기술을 집약한 첨단 시계장치였다. 15세기 조선의 시계제작 기술은 당시 세계적 수준인 이슬람 및 중국과 동등한 위치에 오르게 됐다.
중국은 명(明)에서 청(淸) 왕조로 교체되면서 대통력(大統曆)을 대신하여 서양의 역법인 시헌력(時憲曆)을 사용했다. 조선에서도 1654년부터 시헌력을 시행하면서 새로운 역법에 부합하는 천문시계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당시 서양에서는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기계식 톱니 기어를 갖춘 추동력의 시계를 사용했다. 시간의 정밀성을 높이기 위해 추동력을 일정한 속도로 내려가도록 하는 기술적 해결이 필요했다.
당시에 사용하던 폴리오트 방식의 시계장치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사람이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이다. 그는 1657년 세계 최초로 진자장치를 이용하여 정밀한 시계를 제작했다. 놀랍게도 이 진자장치는 1669년 조선으로 건너와 혼천시계의 동력장치로 사용됐다. 1669년에 제작한 혼천시계는 조선에서 발전시킨 혼천의 제작기술과 서양식 자명종의 동력을 결합해 제작한 독창적인 천문시계이다.
이 천문시계는 조선시대 관상감(당시의 천문기관)의 천문학교수였던 송이영이 만들었다. 그는 서양의 자명종을 연구하여 혼천의와 결합해 획기적인 시계를 발명했다. 송이영은 당시의 천문역법인 시헌력을 시행하는 데 높은 지식을 겸비했고 천문관측에 능통했던 대표적인 천문학자이다. 혼천시계는 홍문관(당시의 학술기관)으로 보내져 여러 학자가 천체운행의 원리와 서양 역법의 이해, 천문관측과 시간측정 교육에 활용했다.
조선 후기에도 시계제작의 전통은 이어졌다. 1762년 홍대용은 자신의 집에 농수각이라는 천문대 시설을 갖추고 혼천의와 자명종을 결합하여 혼천시계를 제작했다. 19세기 초에도 강이중과 강이오가 혼천시계를 만든다. 강이오의 아들인 강건과 강윤은 여러 가지 휴대용 앙부일구(해시계)를 제작했다. 강건과 강윤의 자제도 앙부일구를 제작했다. 집안 대대로 시계를 제작한 것은 조선시대 과학기술사에서도 대단히 특별한 일이다.
조선시대의 시계제작 기술은 오늘날의 연구자에게 계승됐다. 2005년 국내외 학자의 축적된 연구 성과로 실제 움직일 수 있는 혼천시계 모델을 완성했다. 이후 혼천시계 부품에 대한 개선 연구와 고증 절차를 통해 이달에 새로운 혼천시계를 복원했다. 세계 시계제작사의 측면에서 매우 희귀하고 중요한 유물이고, 선조들의 과학적 창의성이 뛰어난 과학기기이며, 과학문화 유산의 복원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혼천시계의 복원전시로 전통과학기술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미래 과학기술의 토대를 이루는 계기를 마련했다. 국립중앙과학관을 찾는 관람객은 혼천시계와 혼천시계의 과학원리를 활용한 체험시설을 통해 이런 의미와 재미를 함께 느낄 수 있다.
김상혁 중앙대 강사 혼천시계 복원 참여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