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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고구려유적 65차례 답사… 공안에 6번이나 잡혀갔죠”

입력 | 2009-08-27 02:54:00


■ 31일 정년퇴임하는 ‘고구려 전문가’ 서길수 교수
“中동북공정 막바지단계
정부기관 비판에 한계
민간에서 대응 나서야”

“잊혀졌던 고구려의 정신을 사람들에게 일깨운 것이 가장 큰 보람입니다. 3년간 푹 쉰 뒤에 고구려 산성 130곳을 기록한 사진 슬라이드를 정리할 겁니다. 책으로 예닐곱 권은 나올 것 같네요.”

서길수 서경대 경제학과 교수(65)가 31일 정년퇴임한다. 그는 1994년 고구려연구회(현 고구려발해학회)를 설립하고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논리 개발에 앞장서 온 고구려 전문가. 경제학자보다 고구려 전문가로 더 알려진 서 교수는 26일 “퇴임을 하게 돼 시원하지만 고구려사의 미래를 생각하면 걱정도 많다”고 말했다.

대학 재학 때부터 민족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서 교수는 교수생활을 시작한 이듬해인 1980년부터 일제가 박아 놓은 쇠말뚝을 뽑으러 전국을 돌아다녔다. 서 교수가 고구려 연구에 본격적으로 몰두하게 된 것은 1990년 만주의 고구려 유적을 둘러보고 강렬한 느낌을 받으면서부터다.

“웅장한 고구려 유적에 숨이 멎을 것 같았죠. 우리 민족의 열등의식을 한 방에 날려버릴 기제를 찾은 것 같아 가슴이 벅찼습니다.”

그 후 서 교수는 65차례에 걸쳐 중국의 고구려 유적을 답사했다. 그는 “중국 공안에 여섯 번이나 잡혀갔다”면서 “하지만 중국의 방해와 압박보다 국내 학계의 백안시하는 풍토가 더 큰 스트레스였다”라고 회고했다.

“우리 학계는 박사학위가 뭔가만 따져요. 사학계는 국사만 역사인 줄 알지요. 과학사, 철학사 등 전문 역사가는 없고 일반 역사가만 있죠. 나도 경제사를 전공한 사람인데, 일반 사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면 무시당하기 일쑤죠. 그래서 제가 더 현장에 몰두했는지도 모릅니다.”

서 교수는 또 “국내 학계의 식민사관, 학연, 지연 등의 문제들이 자신을 더 힘들게 했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국내에서 제 연구를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죠. 논문집을 30개 정도 내니까 중국, 일본에서 먼저 인정해주더군요. 제 스승은 되레 중국학자들이었어요. 사료에 치중하는 국내 학자들보다 그들은 현장에서 공부한 것을 더 중요시합니다.”

서 교수는 29일 서울 마포구 신수동의 한 식당에서 ‘새로운 민족주의의 탄생과 한국 역사학계의 과제’를 주제로 퇴임 강연을 갖는다.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동북공정의 대응 방법을 모색하는 자리다.

그는 “사회주의 붕괴 이후 민족주의가 세계를 지배하면서 중국의 동북공정이 시작됐다”며 “중국이 20년 전부터 준비한 동북공정은 이제 거의 완성단계”라고 말했다.

“중국은 ‘소수민족의 독립요구 억제와 동북아 패권 확대’라는 거대한 계획하에 동북공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정부와 학계가 대응논리 개발에 서두르지 않으면 두 나라가 한 역사를 공유하는 비극, 그러니까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도 되고 한국의 역사도 되는 비극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학계가 만성적인 불감증을 떨치고 서둘러 대응에 나서야 합니다.”

그는 대응논리 개발을 위해 정부 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보다는 민간이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 기관은 중국 비판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서 교수의 생각이다. 학계도 파벌싸움을 그만두고 역량을 모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 교수는 퇴임 후 여유로움 속에서 죽음에 대해 연구할 계획이다.

“죽음의 문제는 인생 최고의 화두죠. 티베트에서는 탄생은 괴로운 것으로, 죽음은 편안한 것으로 생각해요. 교수 직을 끝내는 저도 그런 심정이죠. 15년 전부터 조금씩 죽음에 관한 연구를 진행해 왔어요. 전국 사찰을 돌며 선승들을 만나 편안한 죽음에 대해 배울 예정입니다.”

그동안 서 교수는 고구려연구회를 이끌며 ‘고구려 역사유적 답사’(1998), ‘대륙에 남은 고구려’(2003), ‘백두산 국경 연구’(2009) 등 20여 권의 책을 냈다. 그는 “대학원생들의 도움도 없이 자비를 털어 연구를 진행했던 상황에서 아내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며 아내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서 교수의 부인 이은금 씨(61)는 고등학교 교사로 교지 편집 경력을 살려 학회지 편집을 돕고 고구려연구회 안살림을 도맡았다. 서 교수는 퇴임을 앞두고 자신의 개인사를 담은 ‘대한민국 대학교수’와 함께 제자 등 192명이 참여한 정년기념 논문집 ‘맑은나라 사람들’ 등 4권을 최근 출간했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