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하늘과 땅이 맞닿은 도시
서울은 그야말로 '마천루의 도시'다. 지난 20년간 '서울의 랜드마크'였던 신용산의 150층 '스카이빌딩'의 위용도 이젠 광장동과 중계동에 차례로 들어선 168층, 175층 초고층 아파트들로 인해 사라진 지 오래다. 이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들만 해도 4만 명. 그 자체로 초고층 빌딩은 '도시 생태계'로 진화해 갔다. 공원을 포함한 편의시설 대부분을 내부에 갖추고, 마천루들 사이는 모노레일로 이동이 가능했다. 일단 마천루에 들어간 사람은 나올 일이 없을 정도였다. 집도, 사무실도, 놀이시설도, 교육시설도, 유흥가도, 모두 한 건물 안에 있었다. 빌딩이 곧 동네가 됐다.
서울에 본사를 둔 HD건설과 SS건축공학연구소는 초고층 빌딩 건축기술로 세계적인 명성을 갖고 있는 대형 도시공학회사다. 바람이나 지진에도 안전하고, 환기와 운송기술이 무엇보다 중요한 초고층 빌딩 축조 기술은 진입장벽이 워낙 높은 최첨단 기술이라, 시카고에 적을 둔 배텔사 등 몇몇 회사를 제외하고는 이 기술을 지닌 곳이 거의 없다. 두바이, 샌프란시스코, 나이로비 등에 지어진 초고층 빌딩도 대부분 이들이 지은 것이다.
'버스와 자동차를 지하로!' 2015년부터 서울특별시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520킬로미터 지하도로'는 2030년에 완공돼 서울 어느 지역이든 지하도로로 갈 수 있게 됐다. 한때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고 화재에서 무방비여서 여러 차례 치명적인 사고를 치른 후, 제2의 완공을 한 서울 지하도로는 120킬로미터에 달하는 외곽순환도로와 도심을 방사상형으로 잇는 거미줄 도로망이 지상의 차들을 모두 지하로 끌어내렸다.
지하도로는 4차선. 그 중 2차선은 '자동도로'여서 자동차가 '자동모드'로 알아서 일정 속도로 차간 간격을 조절하며 목적지까지 도착하도록 도와주는 시스템이 장착되었다. 용무가 급한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통근자들은 자동모드를 활용해 출퇴근 시간에 책을 보거나 인터넷 서핑을 즐긴다. 하늘 위로 치솟은 초고층 건물들, 지하로 내려간 교통도로망. 서울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이 맞닿은 도시다.
덕분에 서울의 비싼 땅들은 상위 5%의 경제 계급이 독차지 하게 되었다. 서울의 지상 건물은 대부분 상업지역으로 바뀌었거나 고급 주택가로 변모했다. 정부의 부동산 대책도, 시민들의 자율적인 공공 토지 운동도, 치솟는 땅값을 억제하진 못했다. 물가 상승률도, 주식펀드 상승률도, 땅값을 따라 잡진 못했다.
2049년, 서울 부유층들은 집 안과 밖의 경계가 모호하고, 자연이 집안으로 성큼 들어온 '자연형 주택'에 살고 있다. 큰 나무들이 벽을 뚫고 자라고, 물길이 방들 사이로 난 집.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안전하고 따뜻하고 편리한 집. 자연물과 인공물의 경계가 모호한 집. 도시가 발달할수록 외형은 점점 테크노피아로부터 멀어졌다. 그 내부는 첨단 테크놀로지로 컨트롤되고 있지만.
이런 아이디어가 주목받기 시작한 건 21세기 초였다. 20세기 중반 오스트리아의 건축가이자 생태주의자였던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는 자연과 하나 되는 인공건축물에 대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그는 1980년대 중반 '이상적인 주택단지를 지어달라'는 빈 시의 요청으로 빈 시내 헤츠가세역(驛) 근처에 '집합주택'을 디자인했는데, 그 독특한 디자인 컨셉을 본 딴 주택단지들이 서울 시내 곳곳에 들어섰다.
삭막하고 특징 없는 현대주택과는 달리, 때론 왕궁처럼 위엄 있고, 때론 화려하고 강렬한 색채가 인상적인 주택. 서로 다른 모양의 창들과 구불구불한 복도로 이루어진 개성적인 집들이 서울시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모자이크를 연상시키는 단지도 생겨났고, 울창한 나무들이 벽을 이루고 돌무덤이 계단 역할을 하는 집들도 등장했다. 노민선의 집도 그 중 하나. 그녀의 집에는 큰 참나무가 바닥을 뚫고 벽을 넘어 자라고 있었다.
이런 개성적인 집들은 21세기 중반 무렵 '에코 시티' 개념과 결합하면서 더욱 친자연적으로 바뀌었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생태계를 이루는 '꿈의 도시'로 서울은 점점 진화하기 시작했다. 서울의 따뜻하면서도 변화무쌍한 아열대 기후가 이런 생태계를 더욱 다이나믹하게 바꾸었다.
물론 이 아늑한 생활공간에 가난한 자들의 보금자리는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그들은 서울 외곽으로 빠지거나 거대한 초고층 아파트에 빽빽이 모여 살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