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영 필립스전자 사장은 “기업이 가진 기술을 통해 사회에 기여해야 지속 가능한 기업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한국 시장에서 필립스의 궁극적인 목표도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27년 동안 헬스케어라는 한우물만 판 끝에 자신과 회사 모두를 이 분야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사진 제공 필립스전자
제품을 팔기보다 정직을 팔았습니다
“헬스케어 제품은 생명과 직결
의사 의견 적극 반영해 신기술 개발”
《26일 오후 인터뷰를 위해 찾은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필립스전자 사옥 내 김태영 사장 집무실의 네 벽면은 투명한 유리로 덮여 있었다. 김 사장은 “특별한 건 아니고 생각나는 대로 메모할 수 있도록 보드펜을 쓸 수 있는 유리로 만든 것”이라며 웃었다. 오른쪽 벽면에는 전날 직원들과 회의하면서 김 사장이 직접 적은 숫자와 메모가 빼곡했다. 회사 관계자는 “김 사장은 평사원으로 시작해 사장까지 올랐기 때문에 권위의식 없이 소탈한 편”이라며 “일방적으로 보고를 받기보다는 함께 토론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1982년 필립스전자에 입사한 김 사장은 2006년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필립스전자를 국내 헬스케어 시장 1위로 끌어올렸다.》
○ 제품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
27년째 필립스전자에서 일하고 있는 김 사장은 국내 헬스케어 시장 성장과 함께한 산증인으로 꼽힌다. 그는 “첨단 기술로 사람의 건강을 지키는 장비가 헬스케어인데, 그런 면에서 본다면 1980년대에는 변변한 제품조차 없었고 시장 규모도 미미했다”고 회고했다.
당시에는 복부 촬영을 위한 X선이 전부였던 필립스전자의 헬스케어 제품도 의료환경이 변하면서 자기공명영상(MRI)촬영 기기, 심혈관 전용 X선, 입체 컴퓨터단층촬영(CT) 기기 등 최첨단 제품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가 27년 동안 변함없이 강조하고 있는 원칙만큼은 바뀌지 않았다.
“제품에 없는 기능을 있다고 속여 팔면 어떻게 될까요? 있는 줄 알았던 기능이 없으니 제대로 검진도 안 되고 치료도 못하죠.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겁니다. 생명을 다루는 제품이라 더욱 신중하고 정직하게 판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김 사장은 병원에 처음 납품을 성공했다고 해서 직원을 칭찬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한 번 제품을 구입한 병원이 재구매에 나설 때 칭찬한다는 것.
“헬스케어 제품은 고가이기 때문에 최소 7, 8년은 사용합니다. ‘이 제품 속아서 샀다’는 생각이 들어도 그만큼 써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장단점을 정직하게 설명해 신뢰를 심어준 뒤 다시 우리 제품을 구입하도록 하는 것을 직원들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기술이 변해도 ‘생명에 대한 존중’만큼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일반 소비자가 아닌 의사와 병원이 주 고객인 필립스전자가 ‘심장을 살리는 4분의 기적’ 캠페인을 펼치는 것도 이런 생각 때문이다. 필립스전자는 지난해부터 심장마비 응급처치 대응 매뉴얼을 배포하는 한편 심장마비 응급처치 제품인 자동심장제세동기(AED) 300여 대를 전국 공공기관 등에 기증했다.
“한 해에 4만 명이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있습니다. 이 중 대부분은 초기 4분에 제대로 응급조치만 이뤄진다면 살 수 있는 경우입니다. 따라서 서류가방보다 작은 AED는 우리가 생산하는 제품 중 가장 작지만 가장 큰 일을 해내는 제품인 셈이죠. 이 제품을 많이 파는 것보다 중요한 건 많이 보급해 생명을 더 살리는 일이죠.”
○ 한국, 우수한 의료진과 IT가 강점
3조2000억 원 규모로 추산되는 한국 헬스케어 시장의 특징으로 김 사장은 우수한 의료진과 정보기술(IT)을 꼽았다.
“엄청난 교육을 받고 실전에 투입되는 한국 의료진의 자부심은 매우 강한 편입니다. 신기술이 도입되면 가장 먼저 한국에 들여와 의사들의 견해를 듣고, 이를 본사에 전달해 기술 개발에 참고하도록 합니다.”
실제로 필립스전자는 삼성의료원, 대구가톨릭대 등과 함께 산학협력을 진행해 오고 있다. 우수한 의료진에 IT가 더해진 한국은 병원과 가정을 통신망으로 연결해 예방-진단-치료-관찰이 가능하게 하는 ‘케어 서클’의 전초기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김 사장의 생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필립스의 첨단의료복합단지 투자 가능성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답했다.
김 사장은 “의료산업을 둘로 나눈다면 기업이 발전시키는 기술 분야와, 의사들이 발전시키는 응용 분야로 나눌 수 있다”며 “두 분야 모두 한국은 충분한 요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필립스가 한국의 첨단의료복합단지에 공헌할 수 있는 부분도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그는 “많은 사람이 필립스 헬스케어 기기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며 “수요에 맞춰 제품을 만들기보다, 제품을 만들어 수요를 창출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칠 때쯤 사무실 안쪽 벽면에 적혀 있는 영어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가 발생했을 때의 수준에서 생각하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생각의 차원을 바꿔야 답이 보인다’는 뜻으로 아인슈타인이 한 말이란다. 2006년 대표이사로 이 사무실에 출근한 첫날 그가 직접 적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무수한 문제에 부닥쳤습니다. 답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생각해보면 뭔가 보이고 기회도 생기더군요. 물론 아인슈타인처럼 ‘생각의 차원을 바꾸는’ 정도까지 되는 것은 쉽지 않겠죠.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흉내라도 내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김태영 사장 프로필
―1952년 강원 평창 출생
―1976년 성균관대 전자공학과 졸업
―1982년 ㈜필립스전자 입사
―1985년 ㈜필립스전자 의료기기사업본부장
―1990년 필립스 메디컬 시스템스 아시아태
평양경영위원
―1996년 미국 뉴헤이븐대 MBA
―2000년 ㈜필립스전자 부사장
―2006년 ㈜필립스전자 대표이사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