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하’의 창시자이자 미국와 유럽 등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고 있는 작가 이우환 씨가 돌과 철판을 소재로 한 조각전을 열고 있다. 자연이 잉태한 돌과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철판이 전시공간과 관계를 맺으며 조용한 대화를 나누는 작품들이다. 사진 제공 국제갤러리
마주앉은 돌-쇠 ‘침묵의 대화’
자연과 문명 맺어주는 작업
공간 바뀌면 작품도 변해
내가 무언가를 만든다기보다
현실과 예술의 관계 드러내는 것
한국에서 태어나 스무 해를 살다 일본으로 건너갔다. 1960년대 후반 사물 고유의 세계를 오롯이 드러내는 미술운동(모노하·物派)의 창시자로 명성을 얻었고 50여 년간 일본에서 활동했다. 이 중 절반은 유럽에서 보냈다. 한국 작가일까, 일본 작가일까.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그는 답했다.
“난 이우환이란 작가다. 나는 나를 대표할 뿐이다.”
세계무대에서 작품성을 인정받는 국제적인 작가이자 국내에서 생존 작가 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작가로 꼽히는 이우환 씨(73). 그가 10월 9일까지 서울 종로구 소격동 국제갤러리 신관(02-733-8449)에서 6년 만의 개인전이자 첫 조각전을 연다.
조각전이라 해도 전시장엔 돌과 철판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따로 사는 것을 짝지어주고 인연을 맺어준 작업”이란 것이 작가의 설명. 그가 주선한 돌과 철판의 10가지 만남을 통해 인간과 자연, 문명이 나누는 ‘조용한 대화’에 동참하게 된다.
○ 여백의 울림으로
불안하게 세워놓은 철판 앞에 무표정한 돌이 놓여 있다. 작가는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의 철판을 가리키면서 남북대화나 보이지 않는 벽을 두고 대화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라고 말했다. 철판을 두고 마주앉은 또 다른 돌. 작가는 양쪽 돌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지 않느냐고 물었다. 외부의 힘에 의해 헤어진 느낌을 담아낸 작품은 주변의 현실과 당연한 이치를 재인식하고 돌아보게 만드는 예술의 기능을 생각하게 한다.
철학적 개념이 담긴 조각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지만 작가의 조리 있는 설명을 듣고 보니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내 작품은 사람이 많이 모이면 제 소리를 못 낸다. 그래서 난 작품도 생각도 소수와의 대화가 좋다. 미술을 모르더라도 작품에서 침묵이나 공기의 울림, 혹은 반성하는 느낌을 받는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돌과 철판을 사용한 서구 작가는 많지만 그에겐 물질 자체보다 작품이 놓인 공간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다른 이들이 ‘보편성’을 중시한다면 그는 개별성, 장소성에 중점을 둔다. 공간이 바뀌면 작품의 성격도 달라진다.
“그리는 것과 그리지 않은 것, 만드는 것과 만들지 않은 것과의 자극적 만남을 관계 지음으로써 여백의 울림을 터뜨리는 것이 나의 시각예술이다.”
돌을 찾아다닌 오랜 여정에서 그가 깨달은 것 한 가지. 한국의 돌은 한국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 나라마다 돌은 제 나라 사람을 닮는단다.
○ 유(有)에서 무(無)를
“정체가 모호한 얘기와 정보에 인간은 혼이 빠져 있다. 여기에 나는 잠시 침묵에 귀 기울이게 할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그의 작품은 조용하고 간결하다. 그 안에 해방감 속 긴장감처럼 늘 상반된 개념이 자리한다. 궁극적으로 최소한의 개입으로 최대한의 세계를 표현하고, 유를 통해 무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나는 창조란 말을 쓰지 않는다. 내가 하는 일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에 예술적이라 일컫는 것에 괄호를 쳐서 그 안팎과 관계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그가 깊은 사유와 내공을 바탕으로 맺어준 ‘관계’를 통해 우리는 눈앞에 두고도 보지 못하는 무한의 세계를 체험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