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한 인상의 영화와 달리 지난달 30일 만난 ‘고갈’의 김곡 감독은 쾌활했다. 그리고 자주, 크게 웃었다. 그는 “세상이 잔혹해지기 때문에 나도 잔혹해질 뿐이다”라고 말했다. 염희진 기자
3일 개봉 ‘고갈’ 김곡 감독
‘고갈(exhausted)’은 몸서리쳐지면서도 떨쳐지지 않는 영화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강제로 매춘을 하는 언어장애 여자와 그녀를 부리는 남자, 둘 사이에 어느 날 여자 자장면 배달원이 나타난다. 황량한 잿빛 갯벌과 공단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수간(獸姦), 유두 절단, 사산아 출산 등 살면서 보고 싶지 않은, 볼 거라고 생각지도 못한 장면들이 마지막 30분 동안 다이너마이트처럼 연쇄 폭발한다. 영화를 만든 김곡 감독(31)은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일란성쌍둥이 동생 김선 씨와 함께 ‘비타협영화집단 곡사’를 이끌며 10여 편의 독립영화를 연출했다. 이 문제작은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았다가 재심의를 거쳐 3일 개봉한다. 8월 30일 서울 홍익대 부근 카페에서 만난 김 감독은 이 영화를 대뜸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반응하는 ‘사랑’에 비유했다.
―왜 사랑인가.
“사랑이 그렇듯이 이 영화는 의식의 영역에서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 이 영화 속에서 스쳐 지나간 이미지들이 불현듯 떠오를 때, 그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열광하고 아닌 사람은 분노한다.”
―호불호가 엇갈린다. 많은 대중에게 보여줄 생각으로 만들었나.
“이 영화는 그럴 수 없을 것 같다.(웃음) 그런 생각이었다면 다른 영화를 만들었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처음 선보였을 때 한 관객이 연소자 관람불가만으로 안 된다며 심약한 사람 관람 불가 등급이 있어야 한다고 건의했다.…동감한다.”
―잔혹한 이미지 때문에 김기덕 감독과 비교된다.
“난 김기덕 감독과 반대쪽 끝점에 서 있다. 추상적으로 말하는 잔인함은 비슷한 것 같아도 양상은 다르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서 여성은 반드시 성녀와 창녀 둘 중 하나지만 내 영화에서는 여자든 남자든 모두 동물일 뿐이다. 김기덕 영화가 죄와 구원을 얘기한다면 ‘고갈’에서는 누구도 죄가 없다. 구원을 기다리지도 열망하지도 않는다. 김기덕 감독 영화가 성서라면 내 영화는 동물학이랄까.”
―신체를 자해하고 여성을 학대하는 장면은 여성 관객으로서 보기 힘들다.
“남자들도 불편해한다. 어떤 분들이 내게 ‘사디스트냐’고 묻는데 나도 이 영화가 불편하다! 시사회 때 보다가 가슴이 벌렁거려 도중에 나왔다.”
―그럼 왜 이런 영화를 만드는가.
“이 영화는 만들고 싶어서 만든 게 아니다. 세상이 잔혹해지면 나도 잔혹해질 수밖에 없는 거다. 감독이 하는 건 그런 거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
―영화를 볼 관객에게 미리 ‘경고’를 해둔다면….
“이 영화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절망의 끝자락을 보여줄 뿐이다. 진짜 희망을 보려면 절망을 직시해야 하니까. 이 영화를 보며 절망이라는 긴 터널을 롤러코스터 타듯 지나는 거라고 생각해 달라.”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