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환 제주지사에 대한 주민소환이 무산된 후 “소환 남발을 예방할 수 있도록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는 논의가 무성하다. 일부 의원은 주민소환투표 청구사유를 제한하는 쪽으로 주민소환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현행법은 청구사유에 아무런 제한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가 있으면 고쳐야 한다. 그렇지만 고쳐놓으면 제도가 제대로 운용될지도 섬세하게, 정교하게 따져봐야 한다. 취지와 명분이 그럴듯해도 세부내용이 엉성하면 아주 엉뚱한 결과를 낳기 마련이므로….
주민소환법 어떻게 개정할까
사유 제한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이러이러한 경우에만 소환이 가능하다’고 사유를 열거하는 것(포지티브 방식)이다. 예컨대 배임, 직권남용, 직무유기, 심각한 도덕적 해이 등이 될 것이다. 물론 소환추진 세력이 이런 요건에 맞춰 사유를 써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따라서 언뜻 생각하면 제한의 효과가 크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진짜 결과는 정반대다. 이 경우 대부분의 단체장들은 “권한을 남용한 일이 없다”고 주장하며 ‘사유의 적격성’을 다투는 소송을 할 것이다. 이런 애매한 소송이 얼마나 지루하게 진행되는지 우리는 잘 안다. 현행법상 단체장 임기 4년 중 처음 1년과 마지막 1년은 소환청구가 금지돼 있다. 임기 1년이 지난 뒤 소환투표를 청구하고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2, 3년 더 기다리고 나면 단체장의 임기가 거의 끝나버린다. 소환제도 자체가 무력화되는 것이다. 이 방식을 함부로 선택할 수 없는 현실적인 이유다.
또 하나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이렇게 되면 소환투표의 시행 여부가 결과적으로 사법부 판단에 맡겨진다. 이것이 ‘선출직 공무원의 정치적 책임을 추궁하는 정치과정’이라는 소환제도의 본래 취지에 비춰 옳을까. 그렇지 않아 보인다.
두 번째 방법은 ‘저러저러한 이유로는 소환청구를 할 수 없다’며 사유를 제척하는 것(네거티브 방식)이다. 예를 들어 선거공약이나 국책사업의 이행, 법정 필수공익시설의 설치 등을 이유로 하는 발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재개발조합 등 특정 이익단체의 발의를 제한할 수도 있다.
형식논리로만 보면 이 방안은 별 효과가 없을 것 같다. 제주의 예에서 보듯 청구인들은 ‘정책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정책 집행과정이 독선적이고 비민주적이다”는 식으로 우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런 선언적 규정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나을 수 있다. ‘원래 소환사유가 되지 않는데도 억지 시비를 걸고 있다’는 점이 뚜렷이 부각되는 까닭이다. 생각해 볼 만한 과제다.
하지만 필자는 사유 제척제 도입에 대해서도 망설여진다. 앞서 언급했듯이 주민소환은 본질적으로 정치과정이다. 정책절차나 사법절차가 아니다. 선거에서 유권자의 의사에 대해 이유의 적실성을 따지지 않듯 유권자의 정치적 판단에 맡기는 것이 제도 취지에 어울린다.
정치과정, 정책절차, 사법절차
주민소환과는 달리 주민투표는 정책적 이견을 해소하며, 사법적 절차는 불법행위를 심판한다. 각자 역할이 따로 있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주민소환에 사유 제한을 두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기껏해야 청구사유를 ‘쓰도록’ 요구할 뿐이다. 현재 우리 제도도 그러하다.
최근 빈발하고 있는 주민소환 시도는 한국의 지방자치가 아직 시행착오 단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법규로 뭘 제한하기보다 자정능력 회복을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성숙한 지방자치를 위해서는 가능하면 법은 열어놓고 운용을 합리적으로 하는 쪽이 낫기 때문이다. 이미 여러 차례 관찰됐듯 주민소환이라는 게 결코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소환이 무산되면 추진세력의 정치적 입지도 크게 위축되지 않는가. 또 지방자치를 일컬어 민주주의의 훈련장이라고 하지 않는가.
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tiger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