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유랑자
2년 전 가을, 나는 프랑스 파리에 있었다. 나는 그해 여름의 초입부터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처음의 계획과는 달리 몇 달을 더 체류하게 된 까닭에, 비교적 안락하게 지내던 학생기숙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비록 화장실과 샤워실이 남녀 공용이었고, 창문을 열어놓으면 비둘기들이 들어와 쓰레기통을 뒤져댔고, 방의 사진을 본 친구가 “퀴리 부인이 살던 곳 같다”고 했을지라도, 두 달간 확실한 잠자리를 보장했던 그곳을 떠나야 했을 때는, 파리 시내의 어떤 장소도, 어떤 방도, 어떤 침대도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 다음부터는 내내 전쟁이었다. 처음에는 파리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사이트를 뒤졌고, 다음에는 역시 파리에 거주하는 프랑스인들의 사이트를 뒤졌다. 그러는 사이 퇴거일이 다가왔다. 운이 좋았는지 시내에서 가까운 곳에 한 한국인 유학생의 아파트를 한 달가량 빌릴 수 있었다. 짐가방에 옷가지 몇 벌과 신발 두 켤레를 넣고 나니 더 남는 공간도, 넣을 물건도 없었다.
한 달이 지나고 난 뒤부터는 이곳에서 사흘, 저곳에서 나흘, 이런 식으로 파리 시내를 돌아다녔다.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선 한 유명 관광지에서 몇 발짝만 나가면 처참한 풍경의 빈민가가 나온다는 것도, 한국인이든 현지인이든 여행객이든 조심하는 것이 좋다는 것도 그때 깨달았다.
나는 점점 더 길을 잃지 않게 되었고, 하나의 도시를 가장 잘 아는 방법은 매번 길을 잃는 것이라는 누군가의 말을, 가끔, 생각했다. 짐가방이 점차 거추장스럽게 여겨졌다. 한인 민박집의 침대를 나누어 썼던 사람에게 전기 주전자를 주었고, 방을 빌리려고 했던, 그러나 계약이 틀어지고 만 사람에게 미니 밥솥을 헐값에 팔았다. 그것들을 사용하려면 전기가 필요했다. 돌아갈까, 그러나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한 유스호스텔에서 며칠을 지낼 때였다. 그곳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무조건 방을 비워야 했다. 공원의 밤나무 그늘 밑에 하루 종일 앉아 있었다. 그때 ‘그러나 나 죽으면/시커먼 뱃대기 속에 든 바람 모두 빠져나가고/졸아드는 풍선같이 작아져/삼중당 문고만한 관 속에 들어가/붉은 흑 뒤집어쓰고 평안한 무덤이 되겠지’라는 장정일의 시 ‘삼중당 문고’를 생각했다. 검고 네모진 짐가방을 볼 때마다, 나도 그 안에 구겨진 엽서처럼 들어가 영원히 이동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여러 달이 지나갔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고, 그러한 방식의 이사를 하지 않는 지금, 나는 실소하며 그때를 생각한다.
한유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