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인문학이 처한 현실에 대해 말할 수 있는 학자 가운데 박이문 연세대 특별초빙교수(79·사진)만 한 적임자도 드물다. 철학과 문학을 두루 섭렵한 인문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프랑스 파리 소르본대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남캘리포니아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한국, 미국, 프랑스, 일본을 오가며 강의를 하고 책을 썼다.》
■ 인문학의 철학적 성찰 책 낸 박이문 교수
학과 통폐합-경제적 박탈감 등은 심리적 문제일 뿐 위기 본질은 아냐
자연과학이 인문학 흡수하려는 윌슨의 ‘통섭’ 이론 근본적으로 반대
그런 그가 40여 년간 인문학에 대해 철학적으로 모색한 생각을 정리해 ‘통합의 인문학’(지와사랑)을 최근 펴냈다. 책에는 특히 위기에 처한 인문학을 바라보는 박 교수의 안타까운 심정이 잘 드러난다.
그는 한국이 겪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가 무엇인지부터 정리했다. ‘이공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사회적 관심과 지원, 그에 따른 인문학자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인문학 위기의 본질로 생각하는 경향에 우선 일침을 가했다. “이런 현상은 인문학 계열 학자들의 경제적, 심리적 문제이지 인문학 자체의 위기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인문학과의 통폐합도 해당 연구자들에게는 위기일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곧 인문학의 위기는 아니라고 박 교수는 지적한다.
그는 3일 전화 인터뷰에서 “한국에서의 인문학 위기의 핵심은 인문적 교양의 질적 저하와 부재(不在)다”라고 꼬집었다. 대학 교육을 받은 이들조차도 일정 수준의 인문교양을 갖추지 못하는 구조적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이처럼 낙후된 한국 인문학을 되살리기 위해선 어느 정도 ‘강제’가 개입돼야 한다는 게 박 교수의 생각이다. 그는 “모든 대학, 직업학교에서 문과계, 이공계를 망라해 모든 학생들에게 철학과 문학, 그리고 한 과목 이상의 문화사나 과학사 수강을 의무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깊이’보다 ‘넓이’를 추구하는 인문학자들에 대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박 교수는 “책이 안 팔릴까 봐, 강의가 인기 없을까 봐 ‘대중성’에 기대는 경향은 곤란하다”면서 “진리 탐구를 위해 필요하다면 다른 인문학자에게도 어려울 정도로 난해한 텍스트를 쓰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인문학의 가치에 대해 힘줘 말했다. “인간은 동물이 아니다.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인 존재가 아니다.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물질사회 역시 지속될 수 없다. 인간과 자연을 포괄적으로 보는 인문학적 안목을 모든 시민이 갖춘 사회야말로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뛰어난 문명사회가 될 것이다.”
박 교수는 학문 통합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인문학과 과학의 통합에 대해 그는 “물리학자도 시를 읽어야 하고, 철학자도 생물학에 익숙해야 각각의 학문에서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인문학과 과학의 통합과 관련해 최근 유행하고 있는 ‘통섭’에 대해서 그는 통합의 필요성에는 찬성하지만 ‘통섭’에 깔린 근본적인 생각에는 반대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이 아니라 전자에 의한 후자의 흡수, 즉 인문학의 자연과학화를 뜻한다. 그런데 학문의 흡수통일이 필요하다면 윌슨의 주장과는 반대로 인문학에 의한 자연과학의 흡수로서만 가능할 것이다.”
박 교수는 “과학적 지식이 현대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제대로 쓰이려면 사상, 가치관 등을 결정하는 인문학적 지식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학문과 학문을 엮는 방식에 대해 ‘둥지 철학’이라는 개념을 들어 설명했다. 이 개념에 따르면 지식은 인간이 관념적으로 거처하는 ‘건축물(둥지)’이며, 학문은 ‘둥지 틀기’, 학문 간 통합은 ‘둥지 리모델링’이다. 그는 “모든 자연법칙을 포함해서 어느 것도 고정된 것은 없다. 관념적 둥지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끊임없는 수리와 재조정, 즉 리모델링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박이문 교수는:
1930년 충남 아산 출생. 1955년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1964년 프랑스 소르본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1970년 미국 남캘리포니아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7∼2000년 이화여대, 미국 시먼스대, 포항공대 등에서 교수를 지냈고 2002년부터 연세대 특별초빙교수로 있다. 2006년 인촌상 인문사회문학 부문상을 수상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