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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종양학의 아버지’는 한국인

입력 | 2009-09-05 02:51:00


1990년 작고 김현택 박사, 중국 최초 암연구소 건립 기틀 다져
3·1운동후 中-美서 의학공부
中 종양의학 5대석학 길러내
고국 잊지않고 한국이름 사용

2일 오후 서울 노원구 공릉동 원자력병원에 중국에서 손님들이 찾아왔다. 대표적인 종양학연구소인 톈진(天津)의대 암센터 소속 의사 5명이었다. 이들은 2007년부터 3년째 이어지고 있는 한국원자력의학원과의 공동 콘퍼런스에 참가하려고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과 중국 두 의료 기관 소속 의사들의 인연은 2004년 4월 중국 톈진에서 함께 개최한 고(故) 김현택 박사 탄신 100주년 기념대회에서 시작됐다. 김 박사는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중국에서는 ‘종양학계의 아버지’라 불린다. 톈진암센터가 김 박사의 생전 업적을 기려 그의 흉상을 제작해 병원 앞뜰에 모셔 놓고 있을 정도다. 흉상에는 ‘원적 한국 한성(原籍韓國漢城)’이라고 적혀 있다. 한국 서울 태생이란 뜻이다.

김 박사는 종양학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중국에 종양학의 기틀을 다진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 최초의 암 연구소를 건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중국 항암협회 창립과 종양학 전문 학술지 창간의 산파역을 했다.

이번 콘퍼런스에서 중국 측 단장을 맡은 잉궈광(應國光) 톈진암센터병원 부원장은 “김 박사는 중국 종양의학의 ‘5대 호랑이’로 불리는 석학들을 가르친 것을 비롯해 수백 명의 제자를 양성했다”며 “김 박사는 의학을 전공하는 중국인들이 매우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1904년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난 김 박사는 배재중 재학시절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아버지 김태상 씨는 그를 중국 장자커우(張家口)에 있는 큰형에게 보내기로 결심했고 김 박사의 인생은 전환점을 맞았다. 당시 의대에 재학했던 큰형의 영향을 받아 베이징(北京)협화의학원(協和醫學院)에 진학하면서 암 연구에 흥미를 느낀 김 박사는 1937년 미국으로 떠나 뉴욕 종양센터와 시카고 방사선치료 종양의학연구소 등에서 연수를 받았다. 1939년 중국으로 돌아왔을 때 협화의대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종양외과를 만들어 그에게 주임의 직책을 맡겼다. 1942년 톈진의대로 옮긴 뒤 30여 년간 후학 양성에 매진하면서 톈진암센터 연구소 설립에도 기여했다.

어느 중국인보다 더 중국에 기여한 삶을 산 김 박사지만 한순간도 자신이 한국인임을 잊은 적은 없었다. 1930년 중국 국적을 획득하고 3년 뒤 중국 군벌의 손녀와 결혼했으며 1985년에는 81세의 나이로 중국공산당에 입당까지 했지만 자신의 한국 이름은 끝내 버리지 않았다. 영문 표기도 ‘Kimm’으로 했다. 공산당원으로 정치적인 발언을 한 적도 없었다. 미국 뉴욕에서 마취과 의사로 일하는 아들 데이비드 김(김문배·61) 씨는 “아버지는 우리 3형제가 옌볜(延邊)에 있는 학교로 진학해 한국말을 배우기를 바라셨다”며 “한국 노래라도 알아야 한다며 민요책도 가져다 주셨는데…”라고 말하고는 ‘아리랑’을 흥얼거렸다. 중국 국적이었던 김 박사는 한중 수교가 이뤄지지 않아 고국을 방문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지만 한 인사로부터 초청을 받아 1987년 한국을 방문했다. 죽기 전 꼭 한번 고향 땅을 밟고 싶다는 꿈이 이뤄진 셈이다. 그는 1990년 작고했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