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 바바 교수는 “순수한 고유문화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문화적인 ‘신념’에 불과하다”며 “문화는 지속적인 해석의 과정을 거쳐 새롭게 탄생하는 만큼 타 문화를 ‘번역’해 내는 능력이 요구되는 시대”라고 말했다. 변영욱 기자
탈식민주의 석학 호미 바바 하버드대 인문학연구소장 인터뷰
‘사람의 이동’ 윤리적 측면 고려
어디를 가도 동일한 혜택 누리게
이방인 대하는 개인의 태도 중요
쉼없는 담론 제시해 차별 없애야
세계적인 탈(脫)식민주의 문화이론가인 호미 바바 미국 하버드대 인문학연구소장(60)이 한국을 찾았다. 서구 문화의 지구적 확산이 가속화되고 있는 오늘날 그는 특정 세력의 일방적인 문화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혼성성(hybridity) 개념을 제시해 주목을 받아왔다.
인도 출신 영문학자로 서구 탈구조주의의 영향을 받은 그는 지크문트 프로이트와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 미셸 푸코의 권력 이론, 프란츠 파농의 반제국주의를 자신의 담론으로 재해석해 에드워드 사이드(2003년 작고)와 함께 대표적인 탈식민주의 이론가로 꼽혀 왔다. 그는 푸코의 권력 이론에 의존하면서도 푸코가 놓쳤던 인종적 차이에 의한 권력 행사 과정에 주목했고, 파농이 제국주의 저항의 수단으로 인정한 폭력에는 반대했다. 다보스 포럼의 자문위원이며 2005년 미국 뉴스위크지 선정 ‘차세대 100인의 미국인’이기도 하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이사장 임성준)의 초청으로 처음 방한한 그를 동아일보가 4일 오후 인터뷰했다. 서울 중구 롯데호텔 신관에서 진행한 인터뷰에는 경희대 조성란 교수(영문학)와 서울대 한경구 교수(문화인류학)가 자리를 함께했다.
바바 교수는 세계화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제3세계와 서구 사이에서 한쪽이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지배하거나 장악한다고 인식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그는 “역사는 로마 이후 주기적으로 세계화의 과정을 거쳐 왔다”며 “‘고유한 문화’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이미 다른 문화권의 영향을 받아 변형된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하버드대 동료 교수였던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은 현실과 거리가 있다”고 비판했다.
이상적인 세계화의 조건에 대해 바바 교수는 고용, 보건, 교육 기회의 동등성을 강조했다. 그는 “세계화에는 무역이나 금융의 교류 외에도 ‘사람의 이동’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며 “경제적 효율성뿐 아니라 윤리적인 측면도 충분히 고려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각 나라가 경제나 정치, 문화적인 책임감을 균형 있게 갖춘 체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국가와 지역에 가도 고용, 보건, 교육의 혜택을 동등하게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인종·다문화 사회의 구축이 새로운 과제로 떠오르는 한국에 대해 그는 “교육을 통해 이주자의 동화를 지향하는 것은 곧 다른 형태의 차별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는 “다른 문화에 대한 단순한 지식 습득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제거할 수는 없다”며 “사회가 공론의 장에서 끊임없이 담론을 제공함으로써 차별적인 마음을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바바 교수는 “세계화 문제는 결국 개인의 윤리 문제와 닿아 있다”며 “개인이 자신의 주변에 있는 낯선 이방인을 어떻게 대하는가가 세계화의 도덕적인 문제를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주민 문제는 우리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는 책임의식을 공유하고 소수자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이주의 역사에서는 법적인 차이만큼이나 문화적인 차이도 중요하다. 세계화의 부정적 측면을 해소하기 위해 법적 정치적 사회적 시민권 외에도 ‘문화적 시민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바바 교수의 최근 관심사는 ‘문명 속의 야만’이다. 그는 “폭력과 테러로부터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해지면서 정치가 사라지고 ‘안보’가 다른 문화를 평가하는 프레임이 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9·11테러 이후 미국 정부가 시민들의 시민성을 이끌어 내려고 했는데, 정작 허리케인 카트리나 재해 때 뉴올리언스에서는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권리의 부재가 발생했다”며 “문명 속에서 이와 같은 야만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지만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큰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난해한 개념과 언어유희적인 문장을 많이 써 학계에서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이번 방한 기간에도 예술과 정치의 영역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강연을 펼쳤다. 7일 한국을 떠나는 그는 방한 5일 동안 유네스코 아·태국제이해교육원(원장 이승환) 국제교원 연수, 대여대 인문과학원(원장 오정화) 주최 ‘타자의 문화정치학’ 국제학술대회 등에서 강연했다.
:혼성성(hybridity):
단어 뜻 그대로는 ‘섞인 것의 특성’을 의미한다. 특정 국가나 민족의 문화에 식민자의 지배적인 문화가 침투해도 일방적으로 지배하지 않으며, 피지배자의 저항과 대립 등에 따라 새로운 제3의 문화와 공간이 창출된다는 것이 혼성성 이론의 핵심이다. 이 이론에 따른 정치적 담론의 재해석을 통해 식민화 과정을 재구성할 수 있다고 호미 바바 교수는 제안한다.
:호미 바바 교수는:
1949년 인도 뭄바이에서 소수민족인 파시족으로 태어나 인종 차별을 경험하며 성장했다. 뭄바이대를 졸업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문학과 철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고 옥스퍼드대와 서섹스대, 런던대 방문 교수를 지냈다. 저서 ‘문화의 위치(The Location of Culture)’가 국내 번역됐다. 부인 재클린 바바 씨는 인권변호사로 하버드대 인권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이번에 함께 방한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