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대생서 요리사된 이상민 씨
스물여덟 살의 ‘과년한’ 한 처자가 “한 남자가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고 말했다. 그 남자는 34세 영국인이란다. 제법 사연이 있을 법한 얘기다. 남자는 대영제국훈장까지 받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요리사 제이미 올리버 씨이고, 여자는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호텔 요리사가 된 나름 유명한 한국인 이상민 씨(사진)다.
하지만 사실 올리버 씨와 이 씨는 일면식도 없다. 다만 이 씨가 방황할 때 그가 가야할 길에 ‘빛’을 비춰준 사람이 올리버 씨란다. 사연인 즉 이 씨가 어두운 방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올리버 씨가 등장했고, 그가 요리하는 모습을 보니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심장이 두근거렸다는 것. 이 씨는 “TV가 비춘 빛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 빛으로 길을 인도 받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원래 이 씨는 한양대 의대를 다니던 모범생이었다. 2000년에 입학했지만, 학교 다니던 내내 의사라는 직업에 회의를 품었다. 이 씨는 “오빠가 같은 학교 의대를 다니고 있었다”며 “오빠가 주변에서 워낙 칭찬을 많이 받다 보니 그것이 부러워 특별한 고민 없이 같은 학교 의대에 들어갔다”고 했다. 결국 본과 1학년 때부터 학교를 나가지 않게 됐고, 방황하던 이때 올리버 씨를 TV로 만났다.
이 씨는 “요리사의 꿈을 가져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며 “그날 TV에서 그를 본 것은 운명”이라고 말했다. 이 씨는 2004년 의대를 완전히 그만두고 2005년 3월 한국관광대 호텔조리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이를 용납하지 못한 부모님과의 갈등 때문에 집을 나와야만 했다. 교수들의 주목을 받으며 요리에서도 일취월장하던 이 씨는 2006년 모 방송국 요리 프로그램의 요리 대결에 나가 궁중요리로 1등을 거머쥐며 유명세를 탔고, 이 씨의 부모도 이때부터 그를 받아들였다.
007년 학교를 졸업한 이 씨는 세계 각국의 요리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 먼저 아랍에미리트로 향했고 아부다비의 7성급 호텔 에미리트 팰리스에서 일했다. 이때 인연을 맺은 요리사가 현재 서울 강남구 ‘노보텔 앰배서더 강남’에서 일하고 있는 안토니오 피우 씨다. 이 씨는 이후 스위스로 건너가 호텔 요리는 물론 경영까지 배웠고 2008년 말 한국에 돌아와 ‘옛 스승’과 함께 일하기 위해 올해 초 노보텔 강남에 입사했다.
현재 이 씨는 주방에서 ‘콜’을 담당하고 있다. 호텔 주방은 주로 불을 다루는 분야인 ‘핫(hot)’과 에피타이저, 샌드위치 등을 만드는 분야인 ‘콜드(cold)’로 구분되는데 이 콜드를 줄여서 콜이라고 부른다. 그는 “외국 호텔 주방은 맛이 크게 변하지 않는 범위에서 자기 스타일을 표현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데, 한국은 아직 주방 규율이 너무 엄해 경직된 측면이 있다”며 “그나마 노보텔이 조금 자유스러운 편인 것 같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어려운 점 가운데 하나는 체력 관리. 하루 10시간 이상 서서 일해야 하기 때문에 평소 꾸준한 운동이 필수다. 이 씨는 매일 윗몸일으키기 400∼500개, 5kg 아령은 30분 이상 들고 내린다고 한다. 체력에 관한 한 웬만한 남성 이상이라고 자부한다.
단순히 호텔 주방에만 머무는 요리사가 되길 거부하는 이 씨는 현재 인터넷으로 호주 애들레이드대의 르코르동블뢰 석사과정을 수강하고 있다. 그는 “바쁘지만 내가 하는 일에 대해 행복해하고 매일매일 감격하고 있기 때문에 더 배우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며 “앞으로 외국 유명 호텔의 주방장도 되고 싶고, 교수도 되고 싶고, 또 식당 경영도 하고 싶다”며 꿈을 펼쳐 보이기도 했다.
이런 그에게 우문(愚問)인 줄 알면서도 “의사의 길을 포기한 것이 후회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 씨는 “함께 학교 다녔던 의사 친구들이 호텔에 가끔 식사하러 온다”며 “그 친구들이 내 손에는 작은 메스보다 큰 칼이 더 어울리고, 그 큰 칼을 들고 있을 때 얼굴에서 광채가 난다고 하더라”며 현답(賢答)을 했다.
김기용 기자 k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