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제법 쌀쌀했던 늦가을 어느 날로 기억한다.
“새벽 동대문 패션 상가에 가보자”는 친구의 제안에 흔쾌히 따라나섰다.
처음 가본 그곳에서 만난 패션은 ‘시장 옷은 거기서 거기’라는 선입견을 깨는 데 충분했다. 그날 동대문 패션 상가에서 본 겨울 코트들은 각양각색의 무지개 빛깔들. 단정하고 세련된 스타일의, 그러나 다소 천편일률적인 그해 갈색 톤의 백화점 쇼윈도에 걸렸던 코트들과는 분명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직접 만든, 몇 장 남지 않은 제품이다”며 환하게 웃던 무명의 젊은 디자이너들의 얼굴도 잊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 서울시가 주최하고 서울산업통상진흥원이 주관하는 ‘동대문 패션 축제’(2∼25일)가 기자의 취재 수첩에 오르기 전까지 동대문 패션은 기억 저편 추억으로만 남겨져 있었다. 이후 그곳을 다시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패션전문가 황의건 오피스h 대표는 “바로 그것이 동대문의 한계이자 가능성”이라고 설명한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IMF) 직후 정통 패션 디자인 공부를 하지도 못했고 넉넉한 자본도 없지만 감각 하나로 승부수를 던지려는 일명 젊은 ‘인디 디자이너들’이 동대문 시장으로 속속 뛰어들었죠. 값싸면서도 독창적인 디자인을 갈망했던 당시 소비자들의 입맛에 꼭 맞는 상품을 그들이 내놓으면서 동대문 패션 시장의 ‘춘추전국시대’가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황 대표는 “하지만 10여년 전 동대문을 찾았던 고객들의 상당수가 꾸준히, 그 이후에도 찾지 않는다는 것이 지금 동대문의 딜레마”라고 덧붙였다. 2000년대 명품 브랜드가 국내 시장에 속속 소개되고 중저가의 상품이더라도 강한 마케팅과 브랜드 파워를 앞세운 국내외 브랜드들이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게 되면서 동대문 패션의 입지를 서서히 좁혔기 때문이다.
문제점을 단번에 해결할 수는 없지만 ‘동대문 패션’과 일대 상권을 활성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바로 동대문패션축제. 2000년 처음 시작된 이 축제는 올해도 외국인 바이어들을 상대로 한 수출 상담회(2일)를 시작으로, 동대문 유망디자이너 패션쇼(18일)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담고 있다. 시민들과 함께 어울리는 힙합&댄스 페스티벌(22∼23일) 등도 열린다.
이번 축제의 홍보대사 최범석 제너럴 아이디어 대표는 “이런 행사를 통해 ‘동대문 패션’이라는 브랜드를 홍보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면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동대문에는 아직 창의적인 디자이너들이 상당수 있다”고 전했다.
그는 동대문에서 원단 장사를 하면서 바닥부터 디자인을 배우기 시작해 2006년 한국인 최초로 파리 프렝탕 백화점 등 해외 유명 백화점에 자신의 브랜드 ‘제너럴 아이디어’ 매장을 오픈 한 입지전적 패션 디자이너다. 그만큼 그는 동대문 패션에 대해 애착도, 할말도 많은 듯 했다. 최 대표는 “단기적 이득을 위해 유명 디자이너의 상품을 복제한 제품을 내놓고 서로 비슷한 상품을 팔며 내부적으로 경쟁하는 현 동대문 상권 구조로는 재능 있는 인디 디자이너들이 활동하기 힘들다”이라며 “실력 있는 이들이 모여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제도적인 발판도 마련되고 서로 특화된 분야에 집중하는 등의 내부적인 자구책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김정안 기자 j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