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는 도시 자체가 거대한 패션이다. 그러나 경기 불황이 계속되는 파리에선 요란한 패션이 각광받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죄악시되고 있다. 파리 시내 방돔 광장의 보석상을 기웃거리는 인파는 십중팔구 아시아와 아랍권 관광객들이다. 파리지앵들은 이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럭셔리한 삶을 추구하고 있다. 윤리적 에지(Ethical edge), 현대 예술과의 교감, 미학적 전통…. 모자이크처럼 패션 도시를 이뤄내고 있던 삼색(三色) 파리를 소개한다.
● 1色, 윤리적 에지가 흐르는 메르시 상점
“고마워요, ‘메르시(Merci)’!”
지난달 말 프랑스 파리 시내 ‘생세바스티앙 프루아사르’(St.S´ebastien Froissart) 지하철역 부근에 자리 잡은 ‘메르시’ 상점을 나오면서 그곳을 향해 건넨 나의 인사다. 프랑스어로 ‘고맙다’는 뜻을 지닌 이 가게에 대한 소식은 올 3월 파리의 한 호텔에서 아침식사와 곁들여 읽던 영자 신문에서 처음 접했다. 호화로운 파리 패션 컬렉션을 대대적으로 중계하던 지면 한편엔 이제 막 문을 연 이 상점이 소개돼 있었다. 트렌디한 가구, 옷들과 함께 헌 옷과 책을 팔고 판매 수익 일체는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섬 어린이들을 위해 기부한다는 ‘요상한’ 개념의 가게였다. 프랑스판 ‘아름다운 가게’라고나 할까.
당시엔 시간에 쫓겨 방문하지 못했던 그곳에 가게 된 8월의 파리에선 어느새 “‘메르시’에 가 봤니?”가 파리지앵들의 인사말처럼 통용되고 있었다. “내가 산 책의 수익금이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 쓰인다니 보람 있지 않아요?”(‘메르시’에서 만난 20세 여대생 실비아)
메르시는 ‘아동복의 에르메스’로 통하는 ‘봉푸앵’ 브랜드의 오너 마리프랑스와 베르나르 코앙 부부가 차린 곳이다. 얼마 전부터 국내에서도 판매되고 있는 봉푸앵은 최근 미국 영화감독 겸 작가 우디 앨런이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먹었다’란 책에서 명문 유치원 아이들이 입는 옷으로 인용했던 브랜드다. 고급 아동복 브랜드를 지닌 상점주인 마담 마리프랑스는 친분이 있는 디자이너, 스타일리스트, 아티스트들에게 “내가 수차례 방문했던 마다가스카르의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고 싶다”고 설명한 뒤 그들에게서 시중가보다 30% 저렴하게 판매할 물건을 샀다. 그러고는 판매 수익금 100%를 기부한다. 이 때문에 소비에 죄책감을 느끼는 요즘의 파리지앵들은 이곳에서 마음 편하게 패션을 누리고 있었다.
3개 층에 1500m²(약 455평) 규모인 이곳은 ‘럭셔리’와 ‘자선 활동’이 어떻게 고급스럽게 만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단아한 꽃가게, 마치 현대미술 작품처럼 전시된 필기구와 가구, ‘이브생로랑’과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빈티지 원피스, ‘스텔라 매카트니’와 ‘바르바라 뷔’의 요즘 옷들, 갖가지 색상의 스티커로 가격을 매긴 헌 책들(노란색 스티커는 2유로!), ‘슬로 쇼핑’을 마치고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 메르시의 모토는 ‘나는 내가 준 것을 가진다(J'ai ce que J'ai donn´e)’. 파리지앵들은 이 상점에 ‘올드 프렌치 시크’란 말도 붙였다.
● 2色, 갤러리에 초대받은 거리의 벽화
파리 라스파이(Raspail) 대로에 위치한 카르티에 현대미술재단은 7월부터 11월 9일까지 ‘거리에서 태어나다-그래피티’ 전시회를 연다. 세계적 건축가 장 누벨이 이 재단 설립(1984년) 10주년을 기념해 1994년에 지은 이 웅장한 건물은 외부 벽면까지 화려한 색감의 그래피티(벽화)가 장식하고 있었다. 벽화들은 파리 시내 유명 멀티숍 ‘콜레트’에서 언감생심 ‘침 흘리며’ 봤던 영국 신예 디자이너 피터 필로토의 값비싸고 화려한 드레스보다 훨씬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전시관 내부에 몰린 수많은 인파에 또 한 번 놀랐다. 관람객들은 바닥에 철퍼덕 앉아 전설적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의 영상을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나를 안내한 리안 사크라몬 카르티에 현대미술재단 큐레이터는 “1960년대 미국 하류 계층이 자신의 명성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거리의 벽과 지하철에 그리기 시작했던 그래피티가 컨템포러리 아트로 발전했다”며 “파리 시민에게 진화하는 예술을 재발견하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곳에선 네델란드 작가 보리스 텔레겐, 스웨덴 작가 누그, 파리 거주 미국 작가 존 원 등이 그래피티 작업에 컴퓨터 기술을 활용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었다.
부동산 사업을 한다는 40대 관람객 에마뉘엘 씨는 “몇 년 전 그래피티 작품을 사서 집 안에 들여놓은 뒤 그래피티가 일상에 주는 역동감이 좋아 관심을 갖게 됐다”며 “카르티에가 보석만 파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신예 아티스트를 발굴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럭셔리의 전통을 잇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곳은 2007년엔 국내 작가 이불 씨의 개인전도 열었다.
● 3色, 파리 장식미술관에서 만난 ‘뉴 럭셔리’
마들렌 비오네(1876∼1975)는 19세기 말 전개된 ‘안티 코르셋 세대’ 디자이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여성들이 일터로 내몰리면서 여성의 몸을 옥죄었던 코르셋은 점차 퇴출된 것. 코코 샤넬이 실용적 의상을 들고 나왔다면, 전설적 디자이너 비오네는 상류층을 위한 이브닝 웨어로 여성을 한층 고귀하게 만들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여성복인 페플로스를 변용하거나 옷감을 주름 잡아 유연하게 늘어뜨린 그의 옷은 알베르 엘바즈 랑방 디자이너가 최근 선보이는 극도의 여성미를 무색케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파리 장식미술관이 올해 6월부터 내년 1월 말까지 ‘마들렌 비오네, 패션 순수주의자’란 이름의 전시를 하는 건 그녀가 20세기 초반 선보였던 오트 쿠튀르(고급 기성복)의 정신이 현 세대 디자이너들에게 무궁한 영감을 주고 있기 때문이리라. 패션 공부를 한다는 니콜라 씨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전시된 옷들을 스케치하고 있었다. 그는 “시스루(비침) 소재에 와이어를 덧대 건축적 조형미를 이룬 비오네의 옷이 놀랍다”며 “불황을 겪으며 많은 디자이너와 패션 학도가 과거 디자이너들의 소재와 실루엣을 차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기 활성화 조짐으로 다른 나라보다 일찍 ‘출구 전략(금융긴축정책)’이 논의되고 있는 우리는 어떤 관점에서 럭셔리를 대하고 있나. 행여 아직도 맹목적으로 명품 핸드백에 연연한다면, 지금 파리지앵들이 한 번 더 생각하며 누리는 ‘뉴 럭셔리’ 생활과는 정반대의 삶일 게다.
파리=글·사진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