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히트 번안한 ‘사천가’ 3색 눈길
노자의 도덕경에는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는 구절이 있다. 하나가 둘을 낳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다. 하지만 둘은 왜 넷이 아니라 셋을 낳을까. 또 셋은 왜 다른 수많은 숫자를 건너뛰고 만물이란 무한대로 바로 비약하는 숫자가 될까.
‘전방위 예술가’로 불리는 이자람 씨는 어쩌면 그 뜻을 직관적으로 터득했는지도 모른다. ‘내 이름 예솔이’를 부른 깜찍한 어린이 가수에서 소리꾼으로, 국악뮤지컬 창작가로, 다시 판소리 ‘사천가’의 작자로 변신을 거듭한 이 재주꾼이 이번에 자신을 셋으로 늘리는 분신술을 펼쳤다. 2007년부터 ‘사천가’의 대본과 작창, 음악감독에 소리까지 1인4역을 소화해온 이 재주꾼은 이승희(27)와 김소진(21)이란 2명의 소리꾼을 발굴해 ‘사천가’를 3인3색의 공연으로 탈바꿈시켰다.
“1970년대 임진택 씨가 김지하 시인의 시를 판소리로 불렀다는 ‘오적’이 오늘날 자료실에서만 찾을 수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어요. ‘사천가’가 50년 뒤에도 기억되려면 결국 소리꾼들에 의해 계속 불려야 한다는 생각에, 저와는 다른 색깔의 공연을 펼칠 수 있는 소리꾼들을 찾았습니다.”
과연 이 작품에서 셋은 만물을 낳는 숫자가 될 것인가. 2007년과 2008년 각각 사흘간만 공연했던 이 작품은 소리꾼이 셋으로 늘어나면서 올해 공연기간을 3주로 연장하며 정기공연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사천가’의 내용은 독일의 사회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을 21세기 한국적 상황에 맞춰 번안한 것이다. ‘사천의 선인’은 신의 계명을 지켜 착하게 사는 사람을 찾기 위해 여행하는 3명의 신이 착한 창녀 셴테를 발견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신들이 계속 착하게 살라며 준 돈으로 셴테는 담배 가게를 열지만 사랑에 울고 돈에 속은 뒤 가공의 사촌오빠 슈이타로 변신해 무자비한 사업가로 성공한다. 지킬과 하이드를 닮은 셴테와 슈이타. 사람들은 슈이타가 셴테를 죽이고 사업체를 빼앗았다며 고발하고, 그는 판관으로 변한 3명의 신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
‘사천가’는 이를 21세기 대한민국 사천시에 사는 뚱뚱한 처녀 순덕의 고군분투기로 바꾼다. 순덕의 소리 한자락을 들어보자. “착하게 살기는 하늘의 별 따기. 아무리 노력한들 세상 살기가 어려워요. 저는 뚱뚱해서 취직하기도 어렵고 어디 알바라도 하고 싶지만 뚱뚱한 여자는 아르바이트도 힘들어요. 국민소득 2만 불인들 배고픈 건 여전하고요. 미분양 아파트가 넘쳐나도 내 몸 누일 곳은 없어요.”
이런 현실풍자는 작품 곳곳에서 발견된다. 형식은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등에서 한 번씩은 들어본 듯한 판소리 구성을 닮았지만 그 속에 담긴 이야기는 과거가 아닌 바로 오늘 여기의 이야기라 귀에 쏙쏙 들어온다. 소리꾼 혼자 극을 끌고 가기 때문에 모노드라마 같지만 연극 속 수많은 등장인물로 변신의 변신을 거듭하며 능숙한 연기로 관객의 눈을 즐겁게 한다. 주요 대목마다 해설자로서 소리꾼의 촌철살인의 평이 들어가는 부분은 관객이 극에 몰입해 주제의식을 놓치지 않도록 한 브레히트의 서사극 양식과 찰떡궁합을 이룬다.
판소리 형식을 자유롭게 열어놓은 점도 눈길을 끈다. 다양한 타악기와 베이스기타를 연주하는 3명의 고수와, 극 중간 중간 현대적 춤판을 펼치는 3명의 무용수가 중간중간 극의 진행에 개입한다.
그래도 극의 중심은 소리꾼이다. 이자람의 순덕이 능청맞은 연기가 일품이라면 이승희의 순덕은 여성스러움이 돋보이고, 김소진의 순덕은 귀여운 외모와 중저음의 목청이 빚어내는 불균형이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20일까지 서울 종로구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 111. 02-708-5001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