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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한기흥]정쟁이 헌법 탓인가

입력 | 2009-09-11 02:52:00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1987년 바뀐 헌법에 따라 5년 단임의 직선 대통령으로 선출된 전현직 대통령은 모두 5명이다. 이분들의 공통점은? 개헌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은 아마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대답할 듯하다. 개헌이 필요한 이유의 하나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을 꼽기 때문이다.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1일 “현재의 제왕적 대통령제는 지금까지 갈등과 전투적 상태의 정치를 이끈 만큼 시대적 사명을 다했다”며 “이제는 제왕적 대통령제를 그만둘 때”라고 말했다. 문희상 국회부의장도 “제왕적 대통령제 아래선 죽기살기식으로 대통령선거를 치르고 이를 지키기 위해 또 싸워야 한다”며 개헌 논의의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다.

제왕적 대통령은 미국의 역사학자인 아서 마이어 슐레진저 주니어가 1973년 출간한 ‘The Imperial Presidency’라는 책에 나온 개념이다. 외국과의 전쟁 선포 등을 결정해야 하는 국가 위기 상황에서 대통령이 의회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지나치게 행사해 권력 분립이 위협받는 것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한국에서 제왕적 대통령은 이와는 뉘앙스가 다르다. 주로 국내 문제에 관해 대통령이 제왕처럼 군림하며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지적할 때 쓰인다. 역대 대통령들 중 법치가 아닌 인치(人治), 권력의 사유화, 헌법 경시 등의 논란을 일으킨 경우가 적지 않으니 그런 표현이 설득력을 가질 법도 했다. 대통령 가족과 친인척, 측근들이 초법적으로 은밀한 영향력을 행사하다 결국 사법처리된 일은 제왕적 대통령의 어두운 그늘이다.

개헌론자들은 대통령이 헌법기관장, 공기업기관장까지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는 인사권을 독점하고 있고, 여당을 통해 입법부도 장악할 수 있는 현실에선 정치인 관료 법조인들이 모두 대통령에게 줄을 설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권력만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런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이 국회 등에 있기 때문이다. 국회가 국무총리 임명동의, 국정감사와 조사, 예·결산 심사, 탄핵소추 등의 권한만 제대로 행사해도 대통령의 독주를 상당 부분 제약할 수 있다.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임명제청권과 해임건의권도 마찬가지다.

제왕적 대통령은 대통령에 대한 견제를 정치권이 방기한 데서 비롯되는 측면이 적지 않다. 낡은 정치문화와 관행이 문제라는 얘기다. 노무현 정부 이후 당청 분리로 대통령이 더는 여당 총재로서 의원들에 대한 공천권을 행사하지 않는데도 여당 의원들이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행동을 달리하는 게 과연 헌법 때문일까. 권력 분점을 강조하면서도 많은 의원이 그리도 입각을 선망하는 건 또 뭔가.

개헌의 핵심은 권력구조의 변경이다. 현행 제도가 제왕적 대통령의 폐단을 낳는다면 마땅히 대안을 찾아야 하지만 정치인들도 국회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개헌 후에는 정말 싸움을 안 할 자신이 있나.

슐레진저 박사는 2003년 1월 1일자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제왕적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는 좋은 무기의 하나는 자유롭고 두려움이 없는 언론”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정치문화를 개선하기 위해선 정치권도, 언론도 참 할 일이 많다.

한기흥 정치부장 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