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대통령은 역사에 늦게 나타난 인물로서의 압박감(sense of belatedness)을 갖는다는 관찰은 이번에도 다시 확인된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유일하게 온 국민이 참여해서 선출하는 공직인 대통령직을 맡으면 대통령은 시간의 한계를 넘어 역사 속의 자신의 위치를 의식한다. 그런데 역사는 이미 역사적 업적을 이룩한 전임자로 채워져 있게 마련이다. 우리의 경우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김대중 대통령의 민주화와 햇볕정책, 노무현 대통령의 탈권위와 분권화의 실험 등등. 결국 대통령은 기존의 업적을 뛰어넘는 새로운 역사적 프로젝트에 눈길이 가게 마련인 셈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올 8·15 경축사에서 이른바 근원적 처방을 언급함으로써 정치개혁을 역사적 프로젝트로 추진할 뜻이 있음을 내비쳤다. 탁월한 정치감각을 지녔던 김대중 대통령도, 출중한 호소력을 갖추었던 노무현 대통령도 눈에 띄는 성과를 내지 못한 바 있는 정치개혁 프로젝트에 착수한다는 사실은 역사적 성과와 공허한 약속 사이의 아슬아슬한 갈림길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 대통령의 임기는 충분하게 남아 있고 변화에 대한 요구는 적지 않기에 이번 정치개혁 프로젝트의 앞날을 쉽게 예단할 수는 없다.
먼저 시민들 의지부터 모아야
다만 필자는 여기서 지금까지의 정치개혁 추진의 경험을 돌아보면서 얻을 수 있는 몇 가지의 유의 사항을 짚어보려 한다. 이를테면 정치개혁 매뉴얼 2.0쯤 된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첫째, 정치개혁의 큰 방향은 시민이 가진 핵심적인 가치관 혹은 목표 규범의 틀 안에서만 추진이 가능하다. 청와대가 정치개혁을 앞장서서 주도할 때 개혁의 최대 원군은 여당의원도 아니고 관료도 아니고 바로 시민이다. 심지어 정치개혁을 추진하다 보면 청와대는 개혁을 지원하는 시민과 이에 저항하는 제도정치권 사이에 끼여 있는 경우도 발생한다. 결국 시민의 지지를 모을 수 있는 단순하고도 상징적인 목표를 통해서 개혁의 동력을 얻을 수 있다.
의미 있는 개혁이 이뤄졌던 2004년 초의 정치관계법 개정은 이른바 ‘고비용 저효율 정치의 타파’라는 단순화된 목표에 시민들이 강력한 지원을 보냄으로써 이뤄졌다. 2003년에 몇몇 재벌그룹의 비자금 사건수사가 2002년 대선의 불법선거자금 수사로 이어지면서 시민들의 개혁 요구는 고비용 정치의 타파에 모아졌다. 이에 따라서 모든 기업과 단체가 정치자금을 기부할 수 없도록 하는 획기적인 제도 변화가 가능했고 정당도 방대한 중앙당과 지구당 조직을 축소하거나 폐지하는 데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2009년 현재 시점에서 시민이 원하는 개혁의 목표 혹은 비전은 무엇인가? 지역대립의 해소? 과감한 분권화? 혹은 정치권의 타협과 조정능력의 확보? 모두가 의미 있는 목표지만 아직까지 시민의 요구가 어느 방향으로 분명하게 잡혀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결국 시민의 요구가 어디로 모아지는지를 면밀하게 따져보는 데에서부터 정치개혁을 시작해야 한다.
둘째, 지난 20년간의 정치개혁 역사는 여당과 야당 사이의 합의를 통해서만 실제로 입법화가 이뤄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끊임없는 갈등과 대립을 지속하는 여야 정당이지만 정치관계법의 개정에 있어서만은 합의 처리의 전통을 굳건히 지켰다. 사소한 규정의 변경이나 추가를 포함하면 지난 20년간 정치관계법은 수십 번 개정됐지만 법 개정이 원내 다수당에 의해 일방적으로 처리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다. 다시 말해 정치세력 사이의 경쟁을 규율하는 게임의 규칙에 대해서만은 여야가 언제나 합의를 통해서 처리했다.
예를 들자면 김대중 대통령은 임기 초반부터 지역 대립의 정당체제를 극복한다는 명분 아래 중대선거구제의 도입을 역설했지만 끝내 여야 대립의 벽을 넘지는 못하였다. 당시 야당은 중대선거구제가 한나라당의 영남 기반을 잠식하는 비대칭적 효과만을 가져온다는 굳은 믿음을 갖고 있었다. 결국 김 대통령의 임기 내내 중대선거구제는 제대로 토론조차 하지 않은 채 폐기되고 말았다. 모든 정치제도는 완벽하게 중립적일 수 없고 따라서 정치세력 사이에 일정한 유·불리가 발생하는 것이 모든 정치제도의 본질이다. 정치 질서를 업그레이드하면서도 동시에 여야 합의가 가능한 제도 개혁안을 만들어내는 작업은 각별한 조정능력과 참신한 아이디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여야 조정능력이 최대 관건
시민의 개혁 의지를 집약하고 여야 합의의 장애물을 넘더라도 마지막 관문은 남아 있다. 의미 있는 정치개혁은 우리 민주주의에 내장된 역사적 코드를 벗어날 수는 없다. 정치개혁은 혁명적인 변동이 아니라 부분적이고 점진적인 제도의 수정과 적응의 과정이다. 이 점에서 모든 정치개혁은 우리 민주화와 민주주의의 뿌리를 이루는 핵심적인 코드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 줄여 말하자면 정치개혁은 그만큼 어려우므로 성공한 정치개혁은 역사적인 업적으로 남을 수 있다.
장훈 중앙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