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당장 돈되는 배 만들때 10년 내다보고 드릴십 ‘팠다’
전세계 발주 44척중 29척 수주
대한민국 10대 신기술에 선정
‘각주구검(刻舟求劍).’
옛 중국 초(楚)나라 사람이 칼을 강에 빠뜨리자 뱃전에 표시를 하고 찾으려 했다는 데서 나온 고사성어다. 흐르는 물에 뜬 배가 제자리에 있을 리 없다. 미련한 행동을 빗댄 말로 많이 쓰였지만 요즘이라면 실제로 가능한 상황일 수도 있다. 현대의 조선(造船) 기술은 거친 바람과 파도 위에서도 늘 한자리에 떠 있을 수 있는 배를 개발해 냈기 때문이다. 해저에 구멍을 뚫어 유전을 개발하는 ‘드릴십(Drill Ship)’이 바로 이런 첨단 기술의 산물이다.
삼성중공업은 드릴십 건조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인정받는 회사다. 삼성중공업은 2005년 이후 전 세계에서 발주된 드릴십 44척 가운데 29척을 수주했다. 드릴십 분야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다. 2005년 이후 드릴십을 수주한 회사는 모두 한국 회사이다.
○ 첨단 위치제어장치로 제자리 유지 가능
드릴십은 쉽게 설명하면 바다 밑바닥에 구멍을 뚫는 설비를 갖춘 배다. 삼성중공업이 2005년 세계 최초로 개발한 극지용 드릴십은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산보다 더 깊이 내려가는 관으로 구멍을 뚫는다. 바다 수면에서 11km 깊이까지 시추가 가능하다. 보통 바닷물 깊이가 3000∼4000m이므로 바다 밑 땅속으로도 7∼8km는 뚫고 나간다는 뜻이다.
바다 밑에 구멍을 뚫기 위해서는 파도가 심한 해상에서도 배가 일정한 위치를 유지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보통 바다 한가운데에서 작업하기 때문에 선박을 고정하는 설비를 따로 세우기 어렵다. 드릴십은 동적위치제어시스템(DPS·Dynamic Positioning System)이라는 장치로 스스로의 위치를 파악하고 항상 같은 위치를 고수한다. DPS는 여러 지점에서 동시에 측정한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정보와 배 아랫부분에 장착된 음파송수신기로 위치를 파악한다. 유정(油井) 주변에 음파를 쏘고 그 음파가 반사되는 정보를 분석해 제자리를 찾는 원리다. 이 장치로 위치를 찾으면 배 아랫부분에 달린 6개의 추진기가 360도로 제각기 회전하면서 위치를 제어한다.
이렇게 바다 위에 고정된 배에서 회전하는 ‘드릴 파이프’를 바다 밑으로 보내 해저를 파고 내려간다. 이때 드릴 파이프 끝에 달린 노즐에서 진흙이 함께 분사되면서 굴착된 암석 부스러기 등을 밖으로 밀어내는 역할을 한다. 구멍이 어느 정도 뚫리면 구멍보다 조금 작은 직경의 파이프를 박아 넣은 뒤 파이프와 구멍 벽 사이에 시멘트를 압축해 넣어 굳히면 유정이 완성된다. 드릴십이 유정을 만들어 놓으면 부유식 원유 저장생산설비(FPSO)가 드릴십이 있던 자리로 와서 원유와 천연가스를 뽑아낸다.
○ IT 접목해 건조공정 65% 자동화
삼성중공업의 극지용 드릴십은 지난해 지식경제부가 선정한 ‘대한민국 10대 신기술’ 가운데 하나로 선정됐다. 이 배는 길이 228m, 폭 42m, 높이 19m의 초대형 선박이다. 북극해 지역에서 작업하기 때문에 섭씨 영하 40도의 혹한에도 견딜 수 있도록 주요 장비에 보온 장치가 갖춰져 있다. 높이 16m의 파도가 치고 초속 41m의 강풍이 부는 바다에서도 위치 제어가 가능하다. 시간당 6m씩 바다 밑바닥을 파내려갈 수 있다.
삼성중공업은 이 배를 연구개발하는 데 설계 비용으로만 102억 원을 투자했다. 드릴십 개발을 주도한 이승준 삼성중공업 선체설계팀 상무는 “북극해 지역의 험한 해상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배의 강도를 높이는 데 주력했다”며 “얼음덩어리들이 많이 떠다니는 북극해 지역에서 안정적으로 작업할 수 있도록 선체를 두껍게 만들었고 배가 심하게 요동치는 것을 막는 장치도 덧붙였다”고 말했다.
드릴십에는 설계뿐만 아니라 건조에도 최첨단 기술이 적용된다. 삼성중공업은 이 배의 생산 전 과정에 정보기술(IT)을 접목했다. 강재 가공에서부터 절단, 조립된 블록의 운반 등이 컴퓨터 시스템에 따라 제어된다. 자체적으로 생산 자동화 로봇을 개발해 전체 작업의 65%를 자동 공정으로 진행한다. 일반적으로 노동 집약적 산업으로 알려진 조선업계에서 65%의 공정 자동화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 1척 가격 1조 원… 고유가 시대의 산물
드릴십의 가격은 척당 약 1조 원. 레저용 선박인 크루즈선 다음으로 비싼 선박으로 꼽힌다. 모두 22척의 드릴십을 수주한 삼성중공업은 이 배 한 품목으로만 150억 달러의 수주 실적을 올렸다. 삼성중공업은 이에 힘입어 2007년 212억 달러, 지난해 153억 달러어치의 배를 수주해 2년 연속 세계 최고 수주 실적을 기록했다. 특히 2007년에는 세계 조선업 사상 처음으로 한 해 200억 달러 수주를 넘어섰다.
이처럼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드릴십의 발주가 계속되는 이유는 고유가와 관련이 있다. 2000년대 이전에는 해상 유전 개발이 주로 수심 200∼300m인 대륙붕 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점차 대륙붕 지역에서 새로운 유전을 찾기 어려워진 데다 국제 유가가 올라가면서 석유메이저들이 수심 1600∼3300m의 심해 유전 개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심해 유전 개발에 더 많은 돈이 들어가지만 국제 유가가 배럴당 20달러가 넘으면 심해 유전을 개발해도 충분히 경제성이 있다는 게 석유메이저들의 계산이다. 현재 북해산 브렌트유는 국제시장에서 배럴당 70달러 안팎에 거래되고 있다.
삼성중공업이 드릴십 분야의 강자로 발돋움한 것은 남보다 한발 앞서 기술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다른 조선업체들이 당장 돈이 되는 벌크선이나 컨테이너선, 유조선 등에 관심을 기울일 무렵인 2000년 초부터 드릴십 개발에 착수했다”며 “중국이나 일본 회사들이 따라올 수 없는 신기술을 개발해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고유가 시대와 맞물려 성공을 거둔 셈”이라고 말했다.
:드릴십(Drill Ship):
원유시추선. 바다 한가운데에 해저 유정을 뚫는 특수 선박을 말한다. 같은 자리를 오래 유지하면서 바다 밑바닥에 깊은 구멍을 내야 하기 때문에 만드는 데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하다.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12년전 ‘미운 오리새끼’서 ‘황금알 낳는 거위’로▼
삼성중공업은 한때 삼성그룹의 미운 오리새끼였다. 1990년대 말까지 매출은 2위 대우중공업(현 대우조선해양)의 3분의 2 수준에 그쳤다. 당시 주가는 5000원을 밑돌았다. 삼성그룹 계열 상장사 가운데 최하위권이었다. 1997년 부채비율은 760%에 육박했다.
삼성중공업은 이 시기에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했다. 수익성이 나쁜 건설중장비, 지게차, 발전설비, 선박용엔진 부문을 모두 매각했다. 팔리지 않는 쓰레기 소각로 등 환경사업, 철 구조물사업, 탱크 공장 등은 과감히 정리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사옥 등의 자산을 매각했다. 이를 통해 건설과 조선 2개 부문에만 집중하는 사업구조를 만들어 냈다.
사업구조만이 아니라 업무 효율성과 기술력, 품질을 끌어올리는 데도 매진했다. 집중근무시간 제도와 공정별 소(小)사장 제도를 도입해 업무를 효율화했다. 노조도 각종 복리후생 제도 축소에 동의하며 힘을 보탰다. 경영진은 지역별, 선주별로 세부 수주전략을 수립하고 기자재 사양을 표준화했다. 선박건조 시 용접 및 도장품질의 실명제를 정착시키고 고객의 품질 지적이 한 건이라도 나오면 납기지연에 따른 위약금을 내더라도 선박을 인도하지 않겠다는 ‘품질 마지노선 선언’을 선포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삼성중공업은 ‘백조’가 됐다. 2000년대 들어 연평균 70% 이상의 높은 수주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2007년 수주액은 212억 달러로 단일 조선소로는 세계에서 처음 200억 달러를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2004년엔 30억 달러, 2006년엔 50억 달러, 작년엔 70억 달러 수출탑을 수상했다. 수익성도 좋아졌다. 작년 순이익은 1997년보다 787%나 성장했다.
조선산업이 경기하락의 직격탄을 맞은 작년에도 총 54척 153억 달러를 수주해 세계 조선업체 중 수주량에서 2년 연속 1위 자리를 지켜냈다. 올해 들어서도 7월 네덜란드 로열더치셸로부터 향후 15년간 500억 달러 규모의 천연가스 생산 및 저장설비(LNG-FPSO) 장기 공급계약을 따내는 데 성공하며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김용석 기자 nex@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