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내게 엄마는 언제나 강했다. 숯덩이처럼 타버린 내 모습을 보면서도, 7개월 동안 피부 대신 붕대를 감고 있는 딸에게 붕대 사이로 삐져나오는 진물과 함께 밥을 밀어 넣으면서도, 수술이 기대와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왔을 때에도, 엄마는 내 앞에서 단 한번도 “어떡하니?”라는 말 한마디, 눈물 한 방울 흘린 적이 없는 씩씩하고 강한 엄마였다. 오죽하면 ‘계모’라는 별명까지 얻었을까.
중환자실에서는 하루 20분씩 세 번 주어지는 면회시간에 엄마가 들어와 밥을 먹이는 것이 만남의 전부였다. 당시 나는 엄마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았다. 무슨 일 있으면 나는 늘 엄마의 눈빛을 보았다. 그 흔들림 없는 눈빛 덕에 나는 지금까지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다.
중환자실에서 의료진이 했던 이야기를 듣고 면회 온 엄마에게 “혈당이 떨어졌대. 수혈을 해야 한대” 등등의 이야기를 전했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어…그래? 다들 그러는 거야. 괜찮아”라고 했다. 사실 나 같은 화상 환자에게 혈당이 떨어지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엄마 자신도 무슨 상황인지 모르면서도 언제나 아무렇지 않은 듯 나를 안심시켰다. 엄마가 세상의 전부인 나는 그 말을 믿고, 또 이길 힘을 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엄마는 면회가 끝나고 나가시면 문밖에서 다리가 후들거려 쓰러졌다고 한다. 사고 후 나는 체중변화가 1kg도 없었지만 엄마는 10kg이나 빠졌다. 그러면서도 힘들다는 말 한마디 한 적 없는 엄마였다.
일본에서 수술 받을 때, ‘딸, 병원, 화상, 수술’ 등의 일본어밖에 못하면서도 창밖으로 보이는 십자가를 따라가 그 몇 단어만으로 기도실을 찾아 기도했던 엄마였다. 일본 교회에서 삼계탕 진공 팩을 받았을 때는 나를 먹이겠다고, 병원 주차장에서 끓여서 몰래 병실까지 들고 왔던 엄마였다.
보통은 딸자식이 유학 가 있으면 보고 싶다고 울기도 하고 걱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텐데 지난 5년의 유학 기간에 엄마는 단 한번도 그러지 않았다. 그 강인했던 엄마가 지난여름 내 앞에서 처음 눈물을 보였다. 8월 초 입 주위에 피부이식수술을 받은 뒤 한 번의 강연을 다녀온 후로 이식한 피부의 색깔이 살색이 아닌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다. 이전에 한번 그렇게 보라색으로 변한 피부가 까맣게 죽어가면서 녹아버린 적이 있어서 같은 일이 반복될 수도 있었다. 부랴부랴 강연 스케줄을 취소하고 뒤늦은 절대안정을 취하면서 나와 우리가족의 마음은 그야말로 마음이 아니었다. 그리고 엄마는 “내 몸 아니라서 이런 말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수술 그만했으면 좋겠다”며 “이제는 애간장이 다 녹아서, 엄마도 마음 졸이는 것 지쳐서 더는 못하겠다”고 처음으로 내 앞에서 울먹였다. 언제나 엄마는 울지만 않으셨을 뿐 나보다 더 아파했다. 나는 내 몸이라 아픈 것만큼만 느끼면 되는데, 엄마는 “지선이가 얼마나 아플까…”하는 마음까지 얹어 더 아파했던 것 같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라는 말이 있다. 사고 후 9년 동안 다른 엄마들은 겪지 않는 일을 수없이 겪으며 씩씩하게 지내온 우리 엄마는 강했지만 엄마도 여자였다. 마음 여린 여자였다. 내 나이 서른둘이 돼서야 깨달은 그동안 숨겨졌던 여린 엄마의 마음이다. 이제 다 녹아버린 엄마의 마음을 어떻게 위로하고 살지, 무엇이 엄마 마음에 위로가 될지 고민하면서 사는 것이 나의 숙제다. 늘 강인하기만 했던 엄마에게 가려 보이지 않았던 엄마의 여린 마음을 이제는 내가 안아드려야 할 때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