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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블라디미르’로 16년째 살고 있죠”

입력 | 2009-09-17 02:52:00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최장 - 최다 출연 한명구 씨
“배우는 자기 인생-나이-이름 없어”

《‘가장 오랫동안 고도를 기다려온 사나이.’ 올해로 한국 초연 40주년을 맞은 극단 산울림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 역으로 출연 중인 연극배우 한명구 씨(49)다. 1994년 블라디미르 역으로 이 작품에 처음 참여한 뒤 잠시 럭키 역을 맡았던 1996년과 박사학위 논문을 쓰던 2006∼2007년 시즌을 제외하곤 줄곧 블라디미르로 고도를 기다려 왔다. 16년째다. 1969년 초연부터 지난해까지 모두 1126회에 이르는 전체 공연 중 블라디미르로만 681회. 럭키로 출연한 기간까지 합치면 761회 출연이다. 최장, 최다 출연이다.》

○ 허름한 양복 - 구두도 16년 전 그대로

“제가 농반진반으로 배우 삼무(三無)론을 주창하고 다니거든요. 배우는 이름과 나이, 인생이 없다고. 그만큼 자기가 맡은 배역에 몰두해 살다 보면 정작 자기 인생을 살 틈이 없어요. 그러니 연기인생의 3분의 1을 블라디미르로 살아온 셈이죠.”

블라디미르 역을 위해 연습기간을 합쳐 1년에 최소 넉 달은 수염을 기르고 살아온 그는 그만큼이나 참을성이 대단하다. 2002년 ‘고도…’에 출연할 때는 원인 모를 고열과 소화불량에 시달리면서 65kg이었던 몸무게가 두 달 사이 55kg으로 줄었다. 공연을 마치고 병원에 입원하고서야 담석으로 인한 합병증임이 밝혀졌지만 당시엔 병명도 모른 채 몸살약과 소화제만 먹으면서 79회 공연을 빠짐없이 소화했다.

연극 속 블라디미르는 틈만 나면 ‘이제 그만 가자’고 졸라대는 친구 에스트라공을 타이르며 우직하게 고도를 기다리는 인물이다. 연출가 임영웅 산울림 대표는 이 배역의 특징으로 진지함과 성실함을 가장 우선시한다며 한 씨가 그런 이미지에 가장 잘 맞는 배우라고 말했다.

동아연극상 남자연기상을 1992년과 1997년 두 차례나 수상한 그의 우직함은 이번 공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입고 나오는 허름한 양복은 1994년 그가 첫 공연 때부터 입은 의상이다. 발가락이 삐죽 빠져나오는 구두도 15년 전 직접 멀쩡한 구두를 사서 일부러 대패로 밀고 구멍을 뚫은 바로 그 구두다.

사뮈엘 베케트의 부조리극을 처음 접하는 관객은 당황하기 일쑤다. 특별한 이야기 구조도 없고 뭔가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듯한데 선뜻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역시 ‘고도…’의 출연 제의를 받고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번역된 대본을 읽는 데만 3일이 걸렸어요. 너무 막막해서 밤에 잠이 안 왔죠. 속으로 ‘이걸 어떻게 거절하지’ 하면서 임영웅 선생님을 만났는데 그분의 치밀한 작품 분석을 듣고 감탄해서 출연을 결심했습니다.”

○“한국의 고도, 기다림에 너그러움 담겨”

그가 그때 터득한 이 작품의 묘미는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는 인간의 우스꽝스러우면서 눈물겨운 모습이었다. 임영웅 대표가 주목한 것도 그 지루함을 벗어나기 위해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펼치는 놀이였다.

이 작품의 놀이적 특성에 대해 석사학위 논문을 썼고 연극학 교수(극동대)로 재직 중인 그에게 서양적 고도와 한국적 고도의 차이를 물었다. “서양의 고도에는 기독교적 구원에 대한 갈망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기다림의 고통이 강렬하다면 한국의 고도에는 그 기다림에 너그러움이 담겨 있지 않을까”라는 답이 돌아왔다. 무대에 등장하는 나무가 서양 연극에선 십자가 형태로까지 표현된 반면 한국 공연에선 둥글게 휘어져 있다는 점도 예로 들었다. 사람마다 기다리는 ‘마음속 고도’가 있는 법. 그가 16년째 기다려 온 고도는 어떤 존재일까. “연극배우가 연극만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그 답이었다.

11월1일까지 서울 마포구 서교동 산울림소극장. 02-334-5915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고도’를 거쳐간 배우들▼
전무송 - 정동환 등 주인공 8명
40년간 39명 출연… 4명 별세

사뮈엘 베케트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에는 모두 다섯 명이 출연한다. 길가에서 끊임없이 고도를 기다리는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여행을 하다가 그들을 만나는 권위적인 포조와 그의 몸종 럭키, 그리고 고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소년이다.

극단 산울림에서 40년의 세월 동안 이들 배역을 거쳐 간 배우는 모두 39명이다. 블라디미르가 8명, 에스트라공과 포조가 각각 6명, 럭키가 7명, 소년이 15명. 모두 42명이지만 송영창, 전국환, 한명구 씨가 각각 2개의 배역을 맡았다. 네 명이 별세했는데 이 중 1969년 초연 출연진이 세 명이다. 에스트라공 역을 맡았던 함현진 씨와 포조 역의 김무생 씨 그리고 당시 고등학교 1학년으로 소년 역을 소화했던 이재인 씨다.

초연 때 블라디미르 역을 맡았던 김성옥 씨와 럭키 역의 김인태 씨는 연극계 원로로 건재하다. 블라디미르 역을 거쳐 간 배우로는 전무송, 정동환, 이호성 씨가 있고 역대 에스트라공 중에는 가수 장나라 씨의 아버지 주호성 씨와 영화와 TV에서 활약하고 있는 안석환 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