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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이맛!]추어탕

입력 | 2009-09-18 02:58:00


가을 콧잔등 땀나게 하네

늦가을 논바닥은 허허롭다. 벼들은 다 베어져 밑동만 남았다. 줄지어 앉아 열병식을 한다. 새들은 떨어진 낟알을 주워 먹는다. 쥐들도 논두렁 구멍 집을 부산하게 들락거린다. 바람이 분다. 검불이 난다. 작은 지푸라기들이 소용돌이치며 공중으로 치솟는다.

그 많던 생명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우렁이는 어디로 숨었을까. 미꾸라지들은 어디로 헤집고 갔을까. 개구리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것들을 잡아먹고 살던 물뱀들은 또 어떻게 됐을까. 메뚜기들은 과연 살아있을까? 고개 숙인 벼들 사이로 네모세모 공중그네의 거미들은 어디로 옮겼을까. 논바닥 접시 물에 꼬물거리던 물장구는 죽었을까 살았을까. 참게는 메마른 논바닥의 타는 목마름을 어디서 견디고 있을까. 물꼬 웅덩이에 살던 작은 민물새우와 송사리는 내년 봄에도 과연 볼 수 있을까.

삽으로 논바닥을 파본다. 그렇다. 그 속에 생명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땅속은 축축하고 따뜻하다. 우렁이가 늘어지게 쉬고 있다. 통통한 미꾸라지가 노란 배를 드러내놓고 있다. 참게가 거품방울을 보글보글 날린다.

논은 미꾸라지의 고향이다. 미꾸라지는 봄여름 내내 그 논바닥 흙탕물에서 뒹굴며 뛰논다. 천둥벌거숭이로 요동치며 다닌다. 맑은 물이 순식간에 흙탕물로 바뀐다. 물렁한 흙 속을 요리조리 뚫어가며 분탕질 친다. 울근불근, 미꾸라지는 천하장사다.

‘천하장사’ 가을 미꾸라지는 더 이상 미꾸라지가 아니다. ‘추어(鰍魚)’라는 이름으로 높임을 받는다. ‘가을 추(秋)+고기 어(魚)’ 즉 ‘가을대표 물고기’가 되는 것이다. 몸이 허한 사람들에게 으뜸음식으로 인기를 모은다. 그 힘센 가물치도 추어에는 미치지 못한다. ‘어(魚)’자는커녕 약간 멸시의 뜻이 담긴 ‘치’자가 그대로 붙는다.

추어탕은 서울식과 남도식(전라도, 경상도식)이 각각 다르다. 남도식은 미꾸라지를 뼈째 갈아 넣지만, 서울식은 미꾸라지 살만 으깨어 넣는다. 서울식은 고추장과 고춧가루 그리고 후춧가루로 양념을 한다. 남도식은 강한 산초가루가 많이 들어가고, 된장을 듬뿍 풀어 구수하다.

용금옥(02-777-1689)은 서울 중구 다동에서 78년째 인기를 끌고 있는 서울식추어탕 전문점. 지금도 50년 넘는 단골들이 수두룩하다. 창업자 고 홍기녀 씨의 큰손자며느리 오지현 씨(49)는 “남도식은 뼈를 갈아 넣기 때문에 육수가 거무스레하고, 서울식은 통 미꾸라지를 쓰므로 불그스레하고 맛이 담백하다. 우리 집은 쇠고기와 곱창국물을 밤새 우려내 쓴다. 여기에 미꾸라지 으깬 살과 두부, 유부, 목이버섯, 느타리버섯, 대파, 양파, 호박(봄여름), 동이(가을겨울), 청양고추 등을 넣는다. 미꾸라지는 전북 부안에서 양식된 것을 쓴다. 옛날엔 끓는 물에 두부와 살아있는 미꾸라지를 넣기도 했지만, 요즘엔 대부분 그렇게 하지 않는다. 미꾸라지가 요동을 쳐서 두부가 산산조각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셋째며느리 한정자 씨가 운영하는 원조용금옥(02-777-4749)은 종로구 통인동에 있다.

서울식으로 서울 용두동 대광고 뒤편 곰보추탕(02-928-5435)과 평창동 형제추어탕(02-919-4455)을 빼놓을 수 없다. 곰보추탕은 77년, 형제추어탕은 무려 84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곰보는 양지머리육수에 늙은 호박, 두부, 유부, 버섯, 양파, 대파, 고추장, 고춧가루, 후춧가루와 밀가루를 약간 넣는다. 형제는 사골과 양지머리육수에 숙주나물, 두부, 유부, 버섯, 양파, 대파, 마늘, 생강, 고춧가루를 넣는다. 한약재를 먹여 키운 미꾸라지와 묵은 조선간장을 쓰는 게 특징.

남도식(전라도)은 곧 남원추어탕으로 통한다. 남원의 새집(063-625-2443), 현식당(063-626-5163), 부산집(063-632-7823), 서린식당(063-625-1115) 등과 서울 정동극장 옆 남도식당, 염창동의 남원추어탕(02-3663-2677) 등이 눈에 띈다. 정동남도식당은 40년 역사. 전화번호가 없고, 당연히 예약도 받지 않는다. 입소문으로만 찾는데도 점심 땐 정동극장 앞까지 줄을 선다. 메뉴도 오직 추어탕 하나뿐.

남도식은 걸쭉하고 구수하다. 국물이 밴 시래기가 맛있다. 쌀가루와 들깨 열무시래기 고구마줄기 고사리 등이 들어간다. 얼큰하고 매콤하고, 가끔 뼈 조각이 씹힌다. 염창동 남원추어탕 최영길 사장(54)은 “추어탕은 밥을 조금씩 말아 먹는 게 좋다. 한꺼번에 다 넣으면, 밥알이 불어터져 맛이 달아난다. 중국산 미꾸라지는 보통 국산보다 크고 뼈가 억세다”고 말한다. 부민옥(02-777-2345)도 서울 다동에서 57년째 이름난 경상도식 추어탕집이다. 경상도식은 살짝 데친 풋배추(얼갈이배추)와 부추 방아잎 토란대 등이 들어가는 게 특징. 들깨가 없어 전라도식보다 덜 걸쭉하다. 맛이 소박하다. 부민옥 육수는 사골국물. 미꾸라지는 통째로 간다. 된장, 우거지, 버섯, 부추, 방아잎, 고춧가루, 청양고추 등을 넣는다. 밑반찬은 김치, 무말랭이, 조개젓, 잔멸치볶음 딱 4가지.

미꾸라지와 미꾸리는 다르다. 미꾸리는 미꾸라지보다 몸과 수염의 길이가 짧다. 미꾸리는 전체적으로 몸이 둥글 통통하다. 옛날서울식은 미꾸리를 통으로 써 추탕이라고 불렀다. 미꾸라지를 돌확에 뼈째 갈아 쓴 남도식이 추어탕이다. 요즘은 어디나 미꾸라지를 사용한다.

‘찌그러진 주전자 허리에 차고/미꾸라지를 캔다 벼 벤 밑동을 파면/거기 요동치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아찔함을 건져 주전자에 담는다/확에 갈아 체에 밭치기 전 요것들을/고무함지에 쏟아놓고 소금 뿌려 썩썩 문지를 때/죽을 둥 살 둥 손에 감기던 차진 살맛이/목구멍으로 꼴깍 넘어간다 땀에 번들거리며/고닥새 해 넘어 갈틴디 집에는 언제 가냐고/고시랑고시랑 따라붙던 가시내의 손목도/주전자 속 미꾸라지같이 매끄러워서’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