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곁에 있었는데
당신을 보지 않았어요.
외국인들이 당신을 좋아한다니까 뒤늦게 당신을
다시 보게 됐어요. 그래서 많이 미안해요.
이달 초 서울역사박물관 내 콩두레스토랑에서 열린
막걸리 트랜스포머 전에는 부산의 산성 막걸리, 경기 고양의
배다리 쌀 막걸리, 충북 단양의 소백산 대강 오곡 막걸리,
충남 당진의 신평 양조장 하연연꽃 생쌀 막걸리 등
수많은 참살이 막걸리들이 선보였죠.
깔끔한 맛은 물론이거니와 어쩌면 하나같이 이름도 예쁜지….
일제 강점기 때 집에서 술을 빚는 게 금지되면서
국내 전통주 명맥이 거의 끊겼는데도
이렇게 묵묵히 건재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정부도 뒤늦었지만 지난달 우리 술 산업 경쟁력 강화방안을
마련했죠. 지난해 국세청 통계를 보니
국내 술 시장에서 당신이 차지하는 비중은 3.6%에 그쳤더군요.
이제라도 당신을 다시 보게 돼서 천만다행이에요.
앞으론 더 예쁜 용기에 담긴 당신을 보고 싶군요.
국내 양조장 투어 프로그램도 생겼으면 좋겠어요.
막걸리는 무조건 싸야 한다는 선입견도 버릴게요.
그래야 더 좋은 품질이 개발될 테니까요. 》
미안해, 몰라줘서
고마워, 견뎌줘서
호텔 골프장 패션가 ‘막걸리 신드롬’
목련꽃잎 색깔의 당신을 왠지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단아한 유리병에 술을 따라 부었다. 우유처럼 새하얗지 않아 오히려 우아한 크림 빛…. 곡주(穀酒)인데도 섬세한 과일향이 난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나른한 오후 햇볕이 드는 둥그런 욕조 물에 이 크림 빛 액체를 물에 풀어 몸을 푹 담그고 싶을 정도다.
'피부 미인(肌美人)이 되자'란 부제가 붙은 이 술은 일본 도쿄의 고급 한식당 '고수레'(高失禮)가 팔고 있는 '맛코리'(막걸리)다. '용사마' 배용준 씨가 운영하는 이 식당에서 막걸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인기를 누린다. 알코올 도수는 7도. 첫 판매를 시작한 올 4월부터 8월까지 무려 10만 병이 팔렸다. 주문자 제조방식으로 이 술을 만드는 국순당은 "1년 치로 예상했던 물량을 벌써 다 팔았다"고 했다.
막걸리가 패셔너블한 술로 거듭났다. '남의 나라 술'인 와인과 일본 청주(사케)에 치이고, 하다못해 맥주와 소주에도 밀리던 막걸리의 통렬한 역전승이다. 외국 물 먹은 뒤 화려하게 변신해 온 여인을 보는 듯하다. 다이어트에 좋다고 일본 여성들이 열광하기 시작한 후 막걸리는 거꾸로 한국의 패션 피플을 완벽하게 중독 시키는 중이다.
●막걸리와 패션이 만났다
막걸리를 사발에 담아 마시며 절박한 심정으로 나라를 걱정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막걸리는 최첨단 유행의 공간,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패션의 날개를 달았다. 스키니 진과 아찔한 킬 힐(굽이 매우 높은 구두)로 축복 받은 외모를 뽐내는 여자들, 컬러풀한 스니커즈 또는 윙팁(앞코에 W자 재봉선이 들어간 스타일) 구두로 멋을 낸 남자들이 마시는 술은 와인도 사케도 아닌 막걸리다. '물 좋기로 소문난' 청담동 한식당 겸 바(bar) '미스박'에선 750mL 국순당 '생 막걸리'가 요즘 가장 트렌디한 술이다. 톡 쏘는 탄산 느낌이 청량하다. 세련된 인테리어로 입소문이 난 압구정동 '무이무이' 2층 포차(포장마차) 테이블 곳곳에도 막걸리다.
프랑스 유학파로 패션 브랜드 '자뎅 드 슈에뜨'를 이끄는 디자이너 김재현 씨(41)는 말한다. "스타일리스트 출신 여성 사장이 운영하는 청담동 미스박은 식당 상호를 제가 지어줬어요. 왠지 정감 있잖아요. 전 그곳에서 토종닭 백숙을 먹으며 막걸리를 마셔요. 파리에 살 땐 와인을 마셨죠. 하지만 한국에서 괜찮은 와인을 마시려면 너무 비싸잖아요. 2000년대 초반 퓨전의 물결이 이 동네를 휩쓸고 간 후 사람들은 좀 더 한국적인 것을 가장 세련된 것으로 여기게 됐죠."
검은색 일색이던 국내 제화업계에 유혹적인 구두를 속속 내놓으며 '슈어홀릭' 열풍을 몰고 왔던 '슈콤마보니' 이보현 대표(45)도 막걸리 마니아다. 막걸리와의 인연은 사소한 우연에서 비롯됐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유명 삼겹살 가게 '나리의 집'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다 인근 슈퍼에서 목을 축일 음료를 찾았던 것이다. 그 때 손 글씨체로 '월매'라고 쓰여 있던 캔을 발견했다. 서울탁주제조협회의 월매 막걸리였다. "예쁜 패키지, 두유빛, 깔끔한 맛에 반해 그날부터 집에서 밥 차려 먹을 때 조그만 잔에 부어 마시게 됐어요."
한국의 간판 와인 소믈리에인 공승식 롯데호텔 와인바 지배인은 막걸리에도 '테루아'(술 맛에 영향을 미치는 토양과 기후)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요즘 막걸리를 마시며 와인을 대할 때처럼 술 맛의 무게와 느낌을 상세하게 기록하는 '테이스팅 노트'도 쓴다.
●1년 새 매출 2배 늘어, 프리미엄급 제품도
허름한 뒷골목 대포집을 벗어난 막걸리는 전망 좋은 골프장으로도 진출했다. 태광, 레이크사이드, 아시아나 등 수도권 일대 골프장 30여 곳이 올 봄부터 식당과 그늘집에서 막걸리를 팔기 시작했다. 막걸리만 마시기도 하지만 막걸리, 소주, 사이다를 섞는 이른바 '막소사'를 마시는 사람도 많다. 권승중 경기 용인시 태광CC 식음료 담당 과장은 "예전엔 막걸리를 상온에 보관하면 계속 발효가 일어나 금방 상한다는 인식이 있었지만 발효제어기술을 쓴 생 막걸리와 보관이 간편한 캔 막걸리가 나와 인기가 높아졌다"고 말했다. 30대 여성 골퍼 정은진 씨는 "골프를 마친 후 막걸리를 마시면 시원하고 배도 부르다"며 "예쁜 골프복을 갖춰 입는 것 뿐 아니라 골프 후 막걸리를 마시는 게 일종의 패션 코드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까지 단 한 종류의 막걸리를 팔던 롯데백화점 본점도 현재 14종을 판다.
막걸리의 인기에 힘입어 올해 유통업계 추석 선물로 막걸리 선물 세트도 처음 등장했다. 이마트는 복분자와 청 매실 등을 넣은 과실 막걸리, 캔 막걸리 등 4종의 막걸리를 추석 선물세트로 개발해 내놓았다. 막걸리가 올 7월 이후 전년 동기 대비 200% 이상의 매출 신장세를 이어가고 있어 내놓은 아이디어다. 이 중에는 700mL에 6만9000원인 프리미엄급 막걸리도 있다. 국순당이 고려시대 막걸리의 맛을 재현한 이화주(梨花酒)다. 그동안 와인 계보를 모르면 한껏 주눅 드는 반면, 우리 술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만만하진 않았을까. 숱한 세월 슬픔은 나눠도 기쁨은 외국 술에게 넘겨야 했던 막걸리. 이젠 그 시간들에 유쾌한 '굿바이'를 하면서 축제의 술로 우뚝 섰다.
●커피, 진, 주스, 복분자 '마음대로 칵테일'
색상에 민감한 감각파들은 막걸리 칵테일도 즐겨 마신다. 푸드 스타일리스트 차미나 씨는 갈색, 파란색, 주황색, 보라색 등 4가지 색깔의 막걸리 칵테일을 소개했다. 갈색은 에스프레소 막걸리 칵테일이다. 막걸리 4, 에스프레소 커피 1, 사이다 1의 비율로 섞어 얼음과 함께 믹서에 갈면 된다. 파란색은 막걸리 4, 진(gin) 1, 블루큐라소 1의 비율로 섞어 흔들기만 하면 된다. 달콤해서 여자들이 특히 좋아할만한 주황색은 막걸리 3, 사이다 1, 오렌지 쥬스 1, 망고 쥬스 1의 비율로 섞어 얼음과 함께 믹서에 간다. 마지막으로 보라색은 막걸리 4, 복분자주 1, 사이다 1의 비율로 섞는다.
어디 이뿐이랴. 막걸리로 '나만의 칵테일'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자신이 지닌 색이 부드러운 쌀 막걸리는 편안한 애인 같지 않던가. "늘 네 말을 들어줄게"라고 미소 지어주는 그런 사람…. 쓴 맛을 강하게 남기는 소주에 레몬과 오이를 넣었을 땐 소주의 맛이 강했다. 그러나 막걸리는 자신을 낮추면서 상대를 돋보이게 하는 미덕을 갖췄다. 밸런타인데이 무렵 초콜릿을 만드는 붐이 일었던 것처럼 이번 추석 명절 때는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막걸리 칵테일을 만들어 선물하면 어떨까. 작은 푸딩 용기들에 색색 담아 건네며 이렇게 말하는 거다. "제 마음을 담은 우리 술이에요"라고.
글=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디자인=공성태 기자 coonu@dogna.com
▼ 고려때 막걸리 ‘이화주’ 복원 ▼
‘배꽃이 필 무렵 멥쌀을 불려…’
기자가 이화주를 처음 접한 건 올해 2월 서울 강남구 삼성동 국순당 본사에서 이 회사 배중호 사장을 만났을 때였다. 지난해부터 전통주 복원 프로젝트를 펼치는 국순당은 창포를 원료로 삼은 창포주, 소나무 가지로 빚은 약주인 송절주 등 옛 술들을 문헌을 참고해 복원하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배꽃이 필 무렵 담근다는 고려시대 막걸리, 이화주였다.
당시 배 사장이 아이스크림을 담을 법한 작고 넙적한 유리그릇에 이화주를 대접했을 때,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어머, 걸쭉한 느낌이 떠먹는 요구르트 같아요." 신 맛과 단 맛이 진하게 느껴졌다. '이 술 위에 붉은 오미자를 띄워보면 어떨까.' 당시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쳐간 생각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술의 비밀스런 양조법을 국순당이 동아일보 독자들을 위해 공개했다. 11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일보 사옥의 스튜디오를 찾아온 이 회사 관계자들은 1500년대 '수운잡방'(需雲雜方)이란 요리책에서 발췌한 이화주 만드는 법을 가져왔다. '수운'은 격조를 지닌 음식문화, '잡방'은 갖가지 방법을 뜻한다. 고로 수운잡방은 풍류를 아는 사람들에 걸맞은 격조 높은 요리 만드는 방법이라 하겠다. 원문을 해석하면 이렇다.
'배꽃이 필 무렵, 멥쌀 얼마간을 뜻대로 취해 여러 번 씻어 물에 담가 밤을 재운 다음, 아주 곱게 가루 내어 체로 거듭 친다. 물을 조금씩 뿌리며 힘주어 섞어 오리 알 크기의 단단한 덩어리로 만든다. 개개의 덩어리를 달걀 꾸러미 모양으로 다북쑥 꾸러미로 싸서 빈 섬에 넣어둔다. 칠일 후 뒤집어 주고 삼칠일 후에 꺼내 보아 그 빛이 누런색과 흰 색 곰팡이가 서로 섞여 있으면 꺼내어 잠깐 바람을 쏘였다가 저장해 두고 쓴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