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로 나미에. 동아일보 자료사진 ☞ 사진 더 보기
20일 서른 두 번째 생일을 맞는 일본 가수 아무로 나미에. 1990년대 중후반 연예계는 물론 일본 사회 곳곳에 영향을 끼치며 '아무라 현상'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낸 톱스타다.
CD보다 작은 얼굴 크기. 키 158cm라고는 전혀 믿겨지지 않는 날씬한 팔다리의 황금 비율. 까무잡잡한 피부에 큰 눈망울로 섹시함과 귀여움을 겸비한 매력. 작은 체구로 무대를 누비며 시선을 사로잡는 역동적인 춤. 게다가 노래까지 소화해내는 라이브 실력.
인기가 절정에 이른 1998년 21세의 나이로 그는 갑작스럽게 결혼 소식을 발표했다. 속도위반 임신을 했기 때문. 활동을 1년간 중단하고 아들을 출산한 뒤 다시 가요계에 복귀했다.
아이 딸린 유부녀 댄스가수의 인기는 예전 같지 않았다. 전성기 못지않게 열심히 노래하고 춤을 췄지만 아무로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제이팝(J-POP) '디바'의 자리는 우타다 히카루, 하마사키 아유미 등 후배들에게 넘겨주고 점차 '한 물 간' 추억의 스타로 불리게 됐다.
하지만 2008년 3월. 아무로는 새 음반 '60s 70s 80s'로 1998년 이후 10년 만에 오리콘 싱글 주간차트 1위에 올랐다. 지난해 7월 발매된 베스트앨범 'BEST FICTION'은 6주 연속 차트 1위를 기록하며 150만장 이상 팔렸다.
이달 9일 발매된 아무로의 라이브 콘서트 DVD 'BEST FICTION TOUR'는 첫 주 동안 15만5000장이 팔리며 오리콘 DVD 주간차트 1위를 차지했다. 또 역대 일본 가수의 DVD 첫 주 판매량 1위 기록(2000년 쿠라키 마이의 'FIRST CUT'이 보유한 9만9000장)을 갈아 치웠다.
▲아무로 나미에. 동아일보 자료사진 ☞ 사진 더 보기
정상에 오른 스타들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다가 갑자기 팬들의 외면을 당하게 되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인기의 허망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좌절 속에 은퇴하거나 초라하게 추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아무로는 데뷔 이후 무명의 신인시절을 오래 겪으며 대중의 변덕스러운 사랑에 초연할 수 있었다. 19세기까지 류큐(琉球)라는 독립국가였다가 일본에 복속된 오키나와(沖繩) 현 출생의 쿼터 혼혈이라는 마이너리티 출신인 점도 그를 내적으로 더욱 강하게 만든 비결이었다.
1992년 연예인 양성학교인 오키나와 액터스스쿨에 다니던 아무로는 '수퍼몽키스'라는 아이돌그룹으로 데뷔했다. 깜찍한 얼굴과 댄스 실력으로 TV광고에 출연하는 등 기대를 모았지만 음반을 낼 때마다 대중의 반응은 냉랭했다.
1995년 1월 소속사에선 전략을 대폭 수정했다. 아무로를 전면에 내세우고 그룹 이름을 아예 '아무로 나미에 with 수퍼몽키스'로 바꿨다. 결국 데뷔 3년 만에 유로댄스곡 'TRY ME~와타시오 신지테'가 사랑받으며 인기가수 대열에 합류했다.
아무로도 이후 한 인터뷰에서 신인 때 무명시절이 길었던 것이 음악을 계속 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줬다고 밝힌 바 있다. 인기가 없던 시기를 오래 겪었기 때문에 음반 판매량이나 대중의 환호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자신의 영원한 꿈인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 행복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아무로 나미에. 동아일보 자료사진 ☞ 사진 더 보기
아무로가 그저 달콤한 멜로디와 춤으로만 승부하는 유로댄스 그룹 보컬로 남았다면 지금의 그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인기가 확실히 높아지긴 했지만 당시 아무로는 정상에 이르진 못했다.
'제이팝 마이더스의 손'으로 불리는 가수 겸 음악가이자 프로듀서인 코무로 테츠야에게 발탁되면서 그의 음악 인생은 전환기를 맞았다. 아무로는 1995년 소속사를 이전한 뒤 솔로 가수로 독립해 코무로의 프로듀싱 하에 음악적으로는 물론 가수로서 한 단계 도약했다.
코무로와 함께 작업하며 아무로는 유로댄스 라틴댄스 R&B 등 다양한 장르의 곡을 선보였다. 1995년 12월 발매한 싱글 'Chase the Chance'로 생애 첫 오리콘 싱글 주간차트 1위에 올랐다. 이 음반은 136만장 이상 팔렸고 아무로는 일본 가수들에게 '명예'로 여겨진다는 NHK 홍백가합전에 처음으로 출연해 이곡을 불렀다.
1996년 여고생을 포함해 일본의 젊은 여성들이 아무로의 패션 라이프스타일 말투 등을 그대로 따라하는 소위 '아무라 현상'이 두드러지며 본격적인 그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도쿄 오사카(大阪) 등 대도시 거리에는 아무로처럼 염색한 긴 생머리와 미니스커트, 굽이 높은 부츠를 신고 짙은 화장을 한 여성들이 넘쳤다.
코무로가 프로듀서를 맡은 뒤 첫 발매한 앨범 'SWEET 19 BLUES'는 335만장이 팔렸다. 2~3개월 간격으로 낸 싱글은 연속으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일본 레코드대상 골든디스크상 등 각종 상을 휩쓸었다. 그리고 1997년 2월 발라드 싱글 'CAN YOU CELEBRATE?'이 230만장의 판매량을 올리며 톱스타로서 인기의 절정을 누렸다.
▲아무로 나미에. 동아일보 자료사진 ☞ 사진 더 보기
아무로가 "뱃속에 아이가 생겼다"며 기자회견을 통해 임신 사실을 알리고 혼인신고를 했다고 밝힌 것은 1997년 10월. 상대는 자신에게 댄스를 가르쳐준 15세 연상의 그룹 TRF 멤버 사무였다.
이 소식은 연말 각 언론이 선정한 '올해의 10대 뉴스'에 선정됐다. 20대 초반 여성 사이에선 속도위반 임신과 일찍 결혼을 하는 풍조가 유행하기도 했다. 아무로는 잠시 활동을 중단한 뒤 아들을 출산하고 1년여 만인 1998년 12월 싱글 'I HAVE NEVER SEEN'으로 복귀했다.
이 음반이 오리콘 주간차트 1위에 오르자 아무로는 재기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연속 1위 기록은 거기까지였다.
1999년 복귀한 뒤 두 번째 싱글이 발매되던 날 오키나와 현에 살고 있던 아무로의 어머니가 재혼한 남편의 동생에게 길거리에서 무참히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충격을 받은 아무로는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팬들은 그의 노래에 점점 흥미를 잃어갔다.
대중성을 고려하지 않은 코무로의 난해해진 음악 스타일도 인기가 떨어지는데 한 몫을 했다. 2002년엔 남편과 이혼하며 또 한 차례 아픔을 겪었다. 방송에 출연하고 무대에 서도 예전처럼 '나미에 짱'이라며 열광하던 팬들은 찾기 힘들었다.
자신을 정상에 올린 스승인 코무로와 결별하고 힙합댄스 스타일로 전향해 꾸준히 음악활동을 지속했지만 오리콘 순위와 판매량은 갈수록 떨어졌다. 급기야 2004년 3월 싱글 'ALARM'이 저조한 판매량과 함께 주간차트 10위권에도 들지 못하자 '한 물 간 나이 든 댄스가수'라는 평가가 굳어져 버렸다.
● 오뚝이처럼… 침체를 딛고 다시 정상에 서다
"차라리 결혼하고 은퇴했다면 제이팝의 전설적인 존재로 남았을 텐데…."
전성기에 비해 확 줄어든 팬들 사이에선 이런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아무로는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인기가 아닌 노래와 춤이었다.
한 때 진정한 톱 가수만이 할 수 있다는 '4대 돔 투어'(수만 명이 동시에 관람할 수 있는 일본 4개 도시 프로야구 돔 경기장에서 연속적으로 열리는 콘서트)에 섰던 아무로. 하지만 작은 무대도 꺼리지 않으며 열정적인 라이브 콘서트를 이어 갔다. 방송보다는 무대에서 팬들과 직접 만나며 음악에 대한 열정을 폭발시켰다.
일본인들에겐 다소 생소했던 힙합댄스는 아무로의 새로운 음악 스타일로 점차 자리를 잡았다. 팬들의 호응도 뜨거워졌다. 차트 순위와 판매량이 다시 오르는 가운데 10년 전 아무로에게 열광한 팬은 물론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청소년들 사이에서도 화제의 인물이 됐다.
2007년 6월 아무로는 7번째 앨범 'PLAY'가 오리콘 주간차트 1위에 오르면서 7년 만에 앨범 차트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지난해 3월 프로젝트 싱글 '60s 70s 80s'가 10년 만에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하면서 다시 '디바'로 불리기 시작했다.
4개월 뒤인 7월 베스트앨범 'BEST FICTION'이 연속 6주 1위를 기록하자 일본 언론들은 '신(新)아무라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가장 닮고 싶은 연예인' '가장 패션감각이 뛰어난 연예인' 등 각종 설문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음악적으로는 물론 이미지 면에서도 다시 절정의 인기를 누리게 됐다.
아무로가 오뚝이처럼 재기에 성공한 가장 큰 비결은 인기의 부침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음악 스타일을 꾸준히 개발하고 투자한 결과다. 또 아들을 둔 30대의 어머니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철저히 자기관리에 신경 쓰며 동안(童顔)과 몸매를 유지한 노력도 무시할 수 없다.
이제 10년 만에 다시 정상에 올랐지만 아무로는 방송을 통한 음반 홍보보다 콘서트에 심혈을 기울이며 '마이 웨이'를 고집하고 있다. 새로운 제이팝의 전설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남원상 기자 surre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