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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이익선]D라인, ‘배’ 좀 펴고 살아요

입력 | 2009-09-19 03:03:00


“사람들이 익선 씨 걱정을 하더라고. 배도 부르고 힘들 텐데 새벽부터 나오게 해서 혹사를 시킨다고 말이야.” 첫째를 임신하고 만삭이 되도록 아침뉴스의 일기예보를 하던 내게 보도국의 상관이 해준 얘기다. 상당히 배려하는 듯했지만 실은 그 속에 젊고 예쁜 후배가 줄을 섰는데 아침부터 배불뚝이 아줌마가 나오는 건 별로이니 이젠 좀 알아서 쉴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메시지가 숨어 있었다.

프로그램의 진행자나 뉴스 앵커의 경우는 테이블이 있어서 임신 사실을 꽤 오랫동안 감추는 게 가능하다. 기상캐스터는 선 상태에서 옆으로 돌아섰다가 정면을 보는 동작을 반복하기 때문에 도드라진 배를 감출 재간이 없다. 앞서 ‘감춘다’는 표현을 썼지만 방송가에선 출연자의 임신 사실이 축하받을 일만은 아닌 것이 현실이다. 출산 후의 복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내 경우도 첫째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둘째는 상황이 달랐다. 우선 1년 만에 아이를 갖자 첫아이 때 “축하한다”고 해주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또?”라며 반응을 해올 땐 “내가 잘못한 건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둘째 출산과 함께 몸도 맘도 지쳐있던 나는 결국 기상캐스터 일을 접게 됐다.

임신을 결정하는 일은 말 그대로 빅딜이다. 임신을 통해 얻을 것과 잃을 것을 저울질했을 때 당장은 손해가 큰 게 분명하다. 수입은 끊기고 몸매는 붇고 일상은 고단함의 연속이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고 왜 아무도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던가. 막연히 원망하는 마음도 들고 “다들 겪는 거야”라고 말하는 선배 여성을 보면서 참 우리 엄마들 언니들 할머니들 불쌍하고 바보처럼 살았구나 싶기도 하고 왠지 억울한 마음도 들고 그랬다.

그러나 고단한 일상이 서서히 여유로워지고 불어난 몸매가 줄면서 잃었던 자신감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일에 대한 열의가 새로워지고 어린 생명을 키우는 엄마의 입장에서 모든 점이 고맙고 감사한 현실로 다가왔다.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어야 했다. 과거에 일을 고를 땐 돈이 되는가, 경력에 도움이 되는가, 재미있는 일인가, 이 세 가지가 선택의 기준이었다. 그러나 일할 기회가 줄고 일에 대한 보수도 줄어드는 상황에서 일이란 축복과도 같았다. 자신감을 되돌려주고 더 나은 여성이 되고 싶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이제 일을 선택하는 기준은 단순해졌다. 시간이 되고 내 색깔에 맞다면 감사히 한다.

아이가 건강하고 일이 있고 많은 사람이 아직 내 이름을 기억해 준다, 아이를 업고 돌아다닐 만큼의 건강이 허락된다, 친정엄마가 옆에 계시다…. 아! 세상은 고마운 일 천지다. 신기한 점은 일을 하면서 만나는 내 또래의 엄마 대부분이 거의 같은 생각을 한다는 사실이다. 같은 여정을 지나온 그녀들도 똑같이 숙성된 듯이 보인다. 일을 해도 야무지게 하고 남을 더 잘 배려하고 일과 가정 사이에서 자신의 에너지를 한 치 남김없이 풀가동한다. 이런 엄마들의 파이팅 속에서 최근 신선한 자극이 눈에 띈다. 개그우먼 김지선 씨의 활약이 바로 그것이다.

‘번식드라’라는 재미있는 캐릭터로 배 속에 있는 넷째 아이의 존재를 세상에 당당하게 내보인다. 아이 키우기에 힘겨워하고 외로워하던 엄마의 손을 번쩍 들어주는 그녀의 메시지. 또 임신을 하면 생겨날 여러 가지 부담으로 고민하는 미래의 엄마에게 불꽃같은 자극을 주는 모습에서 참 멋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들만 내리 셋을 낳고 커가는 ‘에너자이저’를 돌보는 일이 분명 쉽지 않을 텐데,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사랑으로 감싸 안으며 넷째의 탄생을 기다리는 그녀. 그런 가운데에도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방송에서 당당하게 자리 잡는 모습을 보면서 임신부가 더 큰 욕심을 가져도 되겠구나 싶다.

고개를 숙이고 길을 걷거나 나온 배를 창피해할 필요가 없으며 알아서 일을 멈추지 말고 설령 그만 쉬라는 종용을 받는다 해도 좀 더 일할 생각이라며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던질 일이다. 출산율 최하위의 국가적 위기감이 그녀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참에 D라인의 임부가 덕 좀 본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

뚱뚱한 아주머니가 일기예보를 하고 백발의 할머니가 뉴스를 진행하고 배부른 임신부가 둘러 앉아 수다를 풀어내는 토크쇼가 없으란 법도 없지 않은가. 임신을 결정하는 일이 어느 누군가의 인생에 심각한 고민거리가 되지 않기를, 다산(多産)의 이야기가 개인의 행복을 포기하는 일로 오해받지 않는 세상이기를 바란다.

최근에 서울 덕수궁미술관에서 있었던 ‘페르난도 보테로’전에선 풍만함의 미학이 근사한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시각을 달리하면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몸매가 바로 D라인이라는 생각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최대의 미션을 수행 중인 임신부 하나하나가 밝고 당당한 표정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자주 보고 싶다.

이익선 방송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