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녁이 아름다운 집/구효서 지음/314쪽·1만1000원·랜덤하우스
소년-여대생 등 화자 통해 삶에 공존하는 죽음 묘사
“예의 구효서의 세계가 그렇듯, 어떤 하나의 색깔로 규정짓기 어려운”(문학평론가 정홍수) 다양한 작품들이 한 권의 책에 수록됐다. 소설가 구효서 씨(52)의 신작소설집 ‘저녁이 아름다운 집’에는 굴참나무나 게임에 빠진 어린 소년, 젊은 여대생 등 각각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화자들이 등장한다. 이 화자들만큼이나 이야기의 결이나 방식이 다채롭다. 작가는 장인처럼 능수능란하게 이야기를 제조해 낸다.
표제작 ‘저녁이 아름다운 집’은 작가가 자주 다루는 ‘삶에 공존하고 있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사전을 뒤적이는 남편, 귀지를 파주는 아내, 곧 집을 지어 이사 갈 강원도 전원에 관한 대화 등 한 부부의 다정한 일상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도처의 행간에 이 부부의 멀지 않은 헤어짐에 관한 암시와 복선이 깔려 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찾고 있는 단어는 ‘묘지, 산소…’이고 그들이 산 땅엔 주인이 누군지도 모를 산소가 하나 있어 이장문제로 골치 아프게 한다. 남편이 새로 들어갈 집에 붙인 이름은 하필 ‘저녁이 아름다운 집’. 서향이라 해가 질 때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누이보다 서른다섯 살이 많아 죽음을 목전에 둔 미국인 매형이 들려주는 이야기도 의미심장하다.
“물 위를 걷는 게 아니라 땅 위를 걷는 게 기적이다.”
이 모든 것은 ‘죽음’이란 하나의 이미지로 수렴해 간다. 아내에게 숨기고 있지만, 남편은 병 때문에 곧 죽을 운명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들의 사연을 남편이 작업 중인 시나리오의 내용과 교묘하게 교차하는 기법으로 이야기의 정교함을 더했다.
죽음을 직접적으로 다룬 또 다른 작품으론 ‘TV, 겹쳐’가 있다. 암으로 누나가 죽자 남동생이 산업화시대를 부대껴간 누이와의 추억들을 텔레비전을 매개로 반추한다. 유년시절 뒷집에서 휴가 가면서 맡긴 텔레비전을 온 가족이 둘러앉아 함께 볼 때 누나가 있었고, 엄마가 운영했던 만화방에 놓인 텔레비전에서 본 것들을 고스란히 말로 전해줄 때도 누나가 있었다. 누나에게 배신감을 느꼈던 것도 텔레비전 때문이다. 공장에서 일하게 된 뒤 책을 읽고, 영어공부를 하고,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누나가 “때가 어느 땐데 테레비만 보냐”고 타박했기 때문이다. 노조를 만들어 싸우다 경찰에 잡혀 돼지처럼 질질 끌려가게 된 누나를 보게 된 것도 텔레비전 속에서였다. 시신을 화장시킨 뒤 누나가 일하던 이주노동자 사무실의 텔레비전을 켠 그. 텔레비전 화면이 자꾸만 겹친다고 성을 낸다. 물론 기계 탓이 아니라 눈물 때문이다.
연인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고 은신하던 남자가 산사에서 죽은 연인을 만나게 되는 신비스러운 체험을 다룬 ‘조율-피아노 월인천강지곡’,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영험한 힘을 얻게 된 명두집의 사연을 통해 죽음의 역설을 일러주는 ‘명두’ 역시 삶과 죽음이 분리돼 있지 않음을, 때로는 삶이 죽음으로부터 출발하기도 함을 보여준다.
소설가 화자를 내세워 일본 규수 지방의 다케노 마을의 한 호수를 둘러싼 내력을 조곤조곤 들춰 보이는 ‘승경’, 만나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위태위태한 올케, 시누이 간의 애증과 연민의 관계를 어린 소년의 눈으로 능청맞고 생생하게 그려낸 ‘막내고모’도 수록됐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