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도심 역사탐방코스
맹사성 권율 박규수 김옥균
집터 곳곳에 역사의 숨결이
‘강호(江湖)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져 있다. 소정(小艇·작은 배)에 그물 시러 흘리 띄워 더져 두고, 이 몸이 소일(消日·한가한 것)하옴도 역군은(亦君恩·또한 임금의 은덕)이샷다.’
시 한수가 절로 나오는 계절이다. 조선 초 재상 고불 맹사성(1360∼1438)은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를 통해 가을의 정취를 이같이 표현했다. 가을에는 작은 배에 몸을 싣고 낚시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제격이라는 것. 낚시까지는 아니더라도 맹사성의 흔적을 따라가 보며 가을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서울 종로구 삼청동 동부 방범초소 맞은편에 서서 강호사시가를 한번 읊어 보자. 이곳에는 맹현(孟峴) 또는 맹감사현(孟監司峴)이라 불렸던 그의 집터가 남아 있다. 맹사성은 퇴근한 뒤 이곳에서 피리를 곧잘 불었다고 전해진다. 위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서울 골목을 누벼보는 것은 가을 나들이의 색다른 맛이다.
○ 옛 위인들의 숨결
조선시대 궁궐과 관청이 자리 잡았고, 관료들이 모여 살았던 서울 종로구에는 옛 위인들의 집터가 곳곳에 남아 있다.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면서 작은 표석만 남겨둔 곳이 많지만 무심코 지나치기에는 그 속에 담긴 이야기가 아쉽다. 행촌동 사직터널 부근 주택가에 있는 권율 장군 집터도 그렇다. 권율 장군이 직접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모진 풍파를 견디며 400여 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은행나무의 풍채는 권율 장군이 왜적을 소탕하며 호령하던 모습과 닮아 있다.
권율 장군의 집은 필운동 배화여고 뒤편에도 있었다. 권율 장군의 사위가 된 백사 이항복이 이 집을 물려받았다. 이항복은 함께 재상 자리에 오른 이덕형과 돈독한 우정을 쌓으며 ‘오성과 한음’이란 이야기를 만든 주인공이기도 하다. 배화여고 뒤편 인왕산 자락에는 ‘弼雲臺(필운대)’라고 새겨진 암벽과 이항복의 집터였음을 알려주는 표석이 있다.
○ 위인들의 스토리텔링
재동 헌법재판소에는 근대화를 외쳤던 조선 후기 개화파들의 꿈이 깃들어 있다. 헌법재판소 안에 개화파들의 스승 박규수의 집터를 알려주는 표석이 자리 잡고 있다. 박규수는 근처에 살던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의 젊은이들을 밤마다 사랑방으로 불러 놓고 개화사상을 가르쳤다. 박규수 집터 바로 옆에는 멀리서도 가지가 하얗게 보이는 600년 된 백송(白松) 한 그루가 이 같은 역사를 모두 안다는 듯 집터를 내려다보고 있다. 박규수의 집터 바로 옆에는 홍영식의 집터가 있고, 김옥균의 집터는 화동 정독도서관 안 잔디밭에 자리 잡고 있다.
종로 중심가 쪽으로 나와도 역사의 숨결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종로2가 장안빌딩 앞은 김상옥 의사가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자결한 곳이다. 김 의사는 폭탄을 던진 뒤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다가 이곳에서 포위되자 “대한독립만세”라고 외치며 자결했다.
이처럼 종로 일대를 누비다 보면 숨겨진 우리 역사와 위인들의 이야기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종로구 관계자는 “정철 현진건 손병희 등 수많은 위인의 흔적이 평범한 동네 골목 안에 살아 있다”며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곳에 숨어 있는 위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성열 기자 ry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