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존민비라는 말이 뜸해진 시대라지만 지금도 민(民)에게 관(官)은 두려운 존재다. 사업으로 대성해 세상의 부러움을 사는 이들이 “관료와 맞붙어선 살아남지 못한다”고 실토한다. 동창회나 향우회에서도 공무원을 상석에 앉히는 예가 많다.
당신들은 과연 억울하게 살았나
말단공무원이라는 말도 당사자가 하면 엄살이고, 제삼자가 하면 불경(不敬)이기 쉽다. 하위직 공무원이라고 우습게 알았다가는 큰코다친다. 행정 창구의 지능적 태업에 애간장을 태우는 민원인이 한둘이 아니다. 지방 실무공무원 몇 사람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기업의 생사를 바꿔놓을 수도 있다.
공무원은 사오정(45세면 정년퇴직) 오륙도(56세까지 일하면 도둑놈) 같은 말이 별로 겁나지 않는다. 헌법과 공무원법이 신분보장을 한다. 독직(瀆職)을 비롯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정년 전에 쫓겨날 걱정은 거의 없다. 6급 이하 공무원의 정년은 외환위기 직후 58세에서 57세(5급 이상은 61세에서 60세)로 짧아졌다가 단계적으로 60세로 연장된다. 이렇게 법을 고친 것이 작년 실업대란과 경제위기 와중이었으니 ‘공무원은 역시 철밥통’이라 할 만하다.
노후보장에서도 공무원은 부러운 존재다. 공무원연금이 국민연금보다 훨씬 유리하다. 재직 중엔 덜 붓고 퇴직 후엔 더 타가는 바람에 공무원연금 적자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걸 메워주는 것도 국민 세금인데 그 규모는 2005년 6096억 원, 2007년 9892억 원, 올해 1조9931억 원으로 불어났다.
민주노총에 이미 가입한 전국공무원노조(전공노)와 그렇지 않았던 전국민주공무원노조(민공노), 법원공무원노조(법원노조)가 21, 22일 투표를 통해 통합 및 민주노총 일괄 가입을 결정했다. 손영태 전공노 위원장은 “반노동정책 등에 대해 이명박 정부를 심판할 수 있는 공무원노조로 거듭날 것”이라고 밝혔다.
노조 가입이 가능한 6급 이하 공무원은 29만여 명이고 이 가운데 21만여 명이 여러 공무원노조에 가입해 있다. 그중 전공노, 민공노, 법원노조는 가입자가 총 11만5000명으로 최대 단일 공무원노조가 된다.
민주노총은 오지랖이 보통 넓은 단체가 아니다. 작년 10월 전국 화섬산업노조 곽민형 수석부위원장은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친북반미세력의 놀이터”라고 비판하며 민주노총을 등졌다. 그는 “순진한 학생들의 촛불을 이용하는 모습과 금융위기 직격탄 속에서 다시 촛불을 들고 사회를 혼란으로 끌고 가려는 것을 보고 탈퇴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이명박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올 6월 정상회담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입각한 평화통일을 지향한다’고 합의하자 민주노총은 “흡수통일 천명”이라고 비난했다. 피땀 흘려 자유와 번영을 이룩한 대한민국이 북한 체제에 입각한 통일을 추구하란 말인가. 민주노총은 홈페이지에 김일성 주체사상 강의 파일을 무더기로 올려놓은 적도 있다.
‘민주노총의 죄’ 키우면 국민이 응징
MBC TV는 작년 4월 29일 날조와 과장으로 가득 찬 ‘광우병’ PD수첩을 방영했다. 이를 신호탄으로 온 나라를 석 달 이상 뒤흔든 촛불시위 중심에 민주노총이 있었다. 조직적 시위를 위해 돈도 많이 썼을 것이다.
민주노총은 지난 대선에서 참패한 대통합민주신당(민주당 전신)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반(反)이명박, 나아가 정권 타도의 이슈와 행동력을 제공한 반정부조직 1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노총의 활동무대는 그에 그치지 않는다.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만드는’ 건전한 노동운동을 주문하는 언론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대표적 신문들과 그 광고주들에 대한 불매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넘치면 쏟아지는 법이다. 민주노총의 이념 편향성, 정치집단화, 권력화, 노동귀족화, 부패집단화에 신물이 난 소속 노조들이 탈퇴 러시를 이루었다. 올해만도 KT 쌍용자동차 영진약품 등 20여개 기업 노조가 민주노총을 버렸다.
3개 공무원노조가 민주노총 일괄 가입을 선택한 것은 지독한 역행으로, 대한민국의 비극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들 노조는 ‘살인정권 규탄대회’ ‘이명박 정권 심판 국민대회’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시위’ 등에 참가한 이력이 있다.
이들은 노조원이기 이전에 대한민국 공무원이다. 국가와 국민으로부터 그만한 대접을 받고 있다. 그런데도 국민 혈세에서 받은 봉급의 일부를 국가 정체성까지 흔들어온 민주노총에 흘려보내고, 스스로 정치세력화해 국기(國基)에 도전한다면 국민에 대한 씻을 수 없는 배신(背信)이다. 이들이 작은 집단태업만 획책하더라도 행정이 교란되고, 국가 신인도(信認度)가 추락하며, 민생경제가 멍들 것이다. 국민은 이를 용서할 수 없다. 당장 공무원 신분보장제도를 재검토해야 한다.
배인준 논설주간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