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2년 본회담 막전막후
“평양서 승용차 제공했는데 서울선 창 가린 버스 나와”
1972년 9월 13일 서울에서 열린 제2차 남북 적십자회담 본회담은 그해 8월 처음 열린 남북 적십자회담에 이어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해 이산가족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공개된 평양 주재 동독대사관의 외교문서(1972년 10월 12일)에 따르면 북한의 평가는 완전히 달랐다. 김재숙 당시 외교부 부부장은 10월 3일 동독대사에게 남측 대표단이 오로지 인도주의 문제에만 신경을 쏟아 회담에서 남북이 격렬히 대립했다고 설명했다.
김 부부장은 당시 회담이 북측 대표단에 자주·평화통일의 기초를 닦기 위해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했지만 통일을 원하지 않는 남측은 오로지 기술적인 문제와 인도주의 문제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남측과 격렬하게 대립했다고 말했다.
북한은 회담 장소부터 바꿔 달라고 시비를 걸었다. “남측이 적절하게 준비하지 않았다. 회담장이 새로 지은 건물인데도 매우 원시적이었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회담이 열린 곳은 서울 중구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이었다. 또 “평양 회담 때 남측 대표단에 승용차를 제공한 반면 서울 회담에서는 북측 대표단에 문이 항상 닫혀 있고 창문에 빛가림이 된 버스를 제공했다”고 불만을 털어놨다.
김 부부장은 특히 남측이 주권에 대한 관념이 없다고 말했다. 회담장 입구에 미국과 일본, 대만의 국기가 걸려 있었다는 것. 그는 “북측 대표단이 그 국기들을 철거하지 않으면 회담장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했고 이 광경을 보던 남측 사람들이 이에 동조해 결국 국기가 철거됐다”고 말했다. 남측이 회담을 판문점 연락사무소에서 열자고 한 것에 대해선 남측이 평양에는 자유민주주의를 퍼뜨리기 어렵고 서울에서 눈물을 흘리며 열렬히 환영하는 사람들을 막을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