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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크림소스 범벅 스파게티는 이탈리아 음식이 아닙니다

입력 | 2009-09-25 02:51:00


서울의 ‘진짜 伊레스토랑’에 가보니

유럽이나 아프리카 같은 머나먼 이국에서 한국 음식을 먹을 때의 기분을 생각해 보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발견한 한국 음식점. 거기에 들어가 갓 담근 아삭아삭한 김치에 따끈한 된장찌개 그리고 갓 구운 불고기 몇 점을 쌀밥과 함께 먹을 수 있다면, 그것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성찬(盛饌)일 것이다. 최근 한국 음식도 많이 세계화됐다지만, 여전히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같은 지역에서 한국 음식을 즐긴다는 건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이탈리아 사람들은 축복받은 민족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이탈리아 음식점이 넘쳐 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인도네시아까지, 러시아에서 칠레에 이르기까지 지구상 거의 모든 국가에서 이탈리아 음식점을 찾을 수 있다. 심지어 지난해 12월에는 북한 평양에서도 이탈리아 요리 전문점이 문을 열었다. 9월 현재 서울에 있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은 700여 곳. 금융위기 여파로 80곳이 폐점했지만, 아직도 그렇게 많단다.

자국 음식점이 많다 보니 한국에 사는 이탈리아인들에게는 오히려 다른 불만이 생겼다. 서울에서 ‘제대로 된’ 이탈리아 음식점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1996년부터 10년 동안 한국에서 살았고 2005년부터는 밀라노 대학에서 한국 문화를 강의하고 있는 주세피나 데 니콜라 씨는 “한국 음식점의 ‘스파게티’는 이탈리아 음식이 아니다”고 단언한다. 니콜라 씨는 “한국에서는 크림이나 토마토소스를 ‘잔뜩 끼얹은’ 기름진 음식을 이탈리아 요리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며 “이 때문에 한국에 사는 동안 제대로 된 이탈리아 음식점을 찾는 것이 고역이었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무역공사 서울무역관이 21일 ‘이탈리아 레스토랑 가이드 서울 2009’ 책을 펴냈다. 서울 시내의 주요 ‘정통’ 이탈리아 식당을 소개하는 책으로 2007년 첫 출간 후 이번이 세 번째 판이다. 처음에는 이탈리아 식재료 수입상을 위한 참고 도서였지만 매년 서울 시내 주요 이탈리아 레스토랑을 꼼꼼하게 분석한 것이 좋은 평가를 받아 올해는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이 책에 소개된 이탈리아 레스토랑은 모두 307곳. 주세페 페출로 이탈리아 무역공사 서울무역관장은 “정통 이탈리아 요리법을 따르고 이탈리아 식자재를 사용한 곳만 선정했다”고 말했다. 그 외에 이탈리아인 조리장이 주방을 지휘하거나 직접 파스타 면을 만드는 것 등도 평가에 반영됐다. 이탈리아 레스토랑 중 가장 ‘이탈리아적인’ 음식을 만드는 곳 두 곳을 추천받아 그 특징을 살펴봤다.

○ 음식은 손이 아니라 발로 만든다

“이곳에서는 어디를 가나 식료품에 둘러싸이지 않는 계절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나폴리에는 1년 중 갖가지 날이 있는데 특히 크리스마스는 잔칫날로 유명하다. 금종이로 싸고 리본으로 묶은 소시지의 커다란 타래, 궁둥이에 붉은 깃발을 꽂아 놓은 칠면조. 그런 것들이 3만 마리나 팔렸다고 한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이탈리아 기행(1829)

괴테가 방문한 1786년에도 이탈리아는 음식의 나라였다. 이탈리아가 다양한 음식문화로 유명해진 건 ‘어디서나 둘러싸인’ 풍부한 식재료 덕분이다. 이탈리아는 지중해 한복판의 반도(半島)라는 지리적 장점과 풍부한 일조량 덕분에 해산물과 채소류, 포도, 각종 육류가 쏟아져 나온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이탈리아 음식점인 ‘카사 안토니오’의 안토니오 파텔라 사장도 무엇보다 ‘좋은 식재료’를 강조했다.

“단순하고 순수하며, 좋은 재료를 사용하지 않으면 이탈리아 음식을 만들 수 없어요. 한국에서 10년 넘게 이탈리아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지만 지금도 매일 새벽 경기지역의 한 시장에 고기와 생선, 야채를 사러 갑니다. 영업상 비밀 때문에 어딘지 말씀드릴 순 없지만, 분명 발품을 판 식재료가 없으면 이탈리아 요리도 없습니다.”

글=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디자인=공성태 기자 coonu@donga.com

거친 파스타-담백한 소스… “伊맛 이게 진짜네”

이 식당은 한국에 살고 있는 이탈리아인이 많이 찾기로 유명하다. 흔히 상상하는 ‘느끼한’ 이탈리아 음식 대신 남부 이탈리아 가정식을 그대로 내놓는다는 장점 때문에 한국에 거주하는 이탈리아인들의 모임 장소가 됐다. 20일 현장을 찾아갔을 때도 전체 손님의 80% 이상이 이탈리아 사람이었다.

한국인들이 가장 오해하는 이탈리아 음식은 뭘까. 파텔라 사장은 ‘카르보나라 스파게티’를 꼽았다. 카르보나라는 스파게티에 문외한인 사람도 이제 이름 정도는 알 정도로 한국에서 유명해진 스파게티다. 파텔라 사장은 “로마에서 먹는 카르보나라는 삶은 면에 가벼운 올리브 오일 정도만 뿌려서 먹는 음식”이라며 “크림소스가 잔뜩 뿌려진 카르보나라를 보면 이탈리아 음식이 한국에 잘못 알려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설명했다.

실제 카사안토니오에서 맛본 해산물 파스타에는 가벼운 토마토소스만 살짝 뿌려져 있었다. 약간 거칠게 삶은 면에 맛이 살짝 밸 정도만 소스를 뿌리는 것이 포인트다. 파스타는 해물과 면, 소스의 맛을 모두 느낄 수 있을 때가 최적의 상태다. 가격은 파스타 1만8000∼2만 원, 피자 1만6000∼2만 원. 위치는 이태원소방서 맞은편. 02-794-8803

○ 재료의 맛이 느껴져야 이탈리아 요리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 이탈리아 레스토랑인 ‘페닌슐라’는 2007년 로마노 프로디 전 이탈리아 총리 방문 이후에 유명해졌다. 방한 당시 이 레스토랑에서 바닷가재 파스타를 맛본 프로디 전 총리가 “현지에서 먹는 것보다 더 맛있다”고 말한 이후 외국인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곳은 이탈리아 본토보다 더욱 이탈리아적인 요리법을 고수하는 것으로 미식가들 사이에서 이름이 높다. 무엇보다도 재료 그대로의 맛을 중시하는 것이 페닌슐라의 요리 철학이다. 페닌슐라의 주재근 조리장은 “보통 이탈리아에서는 감자도 소금과 오일만 넣어 먹는다”며 “신선한 재료를 각자의 맛 그대로 조리하는 것이 ‘좋은’ 이탈리아 식당의 최우선 조건”이라고 말했다.

이곳에선 파스타도 적당히 설익힌다. 한국에서는 ‘푹 삶은’ 면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렇게 먹을 경우 오히려 면이 소스를 흡수하지 못해 맛이 없어진다는 것. 페닌슐라는 지금도 재료의 맛을 충분히 살리고 약간 거친 느낌의 이탈리아 음식을 제공하지만 처음에는 고객의 반발도 많았다.

“워낙 푹 삶긴 한국식 스파게티에 익숙해져 있었던 터라 ‘내가 아는 요리가 아니다’라고 항의하는 고객도 많았어요. 하지만 파스타 소스도 하루 반나절 동안 만들고 그날 모두 소비한 후 남은 건 버리는 등 신선함과 이탈리아 정통 맛을 강조하니 손님들도 이해하더라고요.”

페닌슐라는 이제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고 있다. 24년 경력의 주 조리장과 32세의 젊은 이탈리아인 조리장 안드레아 주콜로 씨의 ‘투톱 체제’를 시도하고 있다. 주콜로 조리장이 6월부터 근무하기 시작하며 이곳의 맛도 바뀌었다.

“주콜로는 송아지 정강이 요리인 ‘오소 부코’를 만드는 데 24시간이 걸립니다. 그 질긴 부위가 약한 불에 그렇게 구우면 놀랍도록 부드럽습니다. 음식의 질감과 조직을 철저히 분석하는 ‘분자요리’를 이탈리아 음식에 적용하면 저렇게 되는 거겠죠.”

페닌슐라가 다시 주한 이탈리아 사람들 사이에서 ‘진정한’ 이탈리아 음식을 제공하는 음식점이 됐다는 평에 주 조리장은 이렇게 말했다. 가격대는 파스타 2만2000∼3만 원. 피자 2만4000∼2만7000원. 세금 및 봉사료 별도. 02-317-7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