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쾌한 절벽산책 6km…넉넉한 동네인심은 덤
강은 쉼 없다. 세월도 그렇다. 사람도 같다. 그래서 세상은 변한다. 그러나 변함없는 것도 있다. 강의 흐름이 그렇다. 세월의 무상함이 그렇다. 세상사 만만찮은 것 역시 그렇다. 그 변화, 그리고 무변. 모두가 자연의 이치인 것을. ‘스스로(自) 그러하다(然)’는 글자 그대로 자연은 ‘스스로 존재하는 그 자체’다. 변하면서도 변함없는 절대 선(善)이다.
그 자연을 보며, 아니 동강의 물골을 보며 생각한다. 도대체 자연의 힘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바위산 하나가 예리한 칼로 싹둑 잘린 듯 수직 50m가 넘는 단면을 드러낸 채 강안을 두르고 있다. 뼝대(강안의 수직 바위절벽을 부르는 강원도 말)를 두고 하는 말이다. 가없는 시간 속에 일순간도 멈추지 않고 흐르는 이 강, 그 물에 깎여 몸통이 절반이나 날아간 거대한 바위산. 동강 물골은 그 뼝대로 이뤄진 천국이며 덕천리(정선군 신동읍)는 게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비경오지다.
오늘은 뼝대와 동강, 주변 산악과 물돌이 마을이 빚은 덕천리 물골 비경을 아주 특별한 길로 안내한다. 뼝대의 에지(edge·가장자리), 벼랑 끝자락을 따르는 ‘동강 뼝대 벼랑마루 트레킹’이다. 이 코스를 ‘블랙야크와 함께하는 에코트레킹’ 시리즈의 전 코스를 개발해온 국내 최고의 트레킹전문 승우여행사 이종승 사장의 안내로 답사한다.
오전 9시. 국도38호선을 달리던 내 차는 예미(정선군 신동읍)에서 국도를 벗어나 덕천리 물골의 제장나루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이 고개만 넘으면 동강. 서울을 출발한 지 3시간만이다. 초가을 새벽을 덮은 짙은 안개는 어느새 사라지고 하늘은 온통 파란 가을빛으로 쨍쨍했다. 그런데 고개 마루에 올라서자 다시 희뿌연 안개가 앞을 가린다.
고개 너머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아직도 안개에 파묻혀 있었다. 물론 해도 들지 않았다. 해는 아직도 물골 동편의 산에 가렸고 그래서 골 안은 여태 동트기 전이다. 물컵에 드라이아이스를 빠뜨린 적 있으신지. 어둑한 골 안이 딱 그 모습이다. 물안개로 뒤덮인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오전 9시도 여기선 새벽인 듯했다.
오전 10시 반. 중천을 향해 가파르게 오르던 해가 마침내 산을 넘었다. 동시에 햇빛이 골 안에 떨어졌다. 안개와 해는 천적이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안개는 혼비백산 흩어졌다. 그러면서 동강의 초록 물과 골 안에 우뚝 솟은 뼝대, 물돌이 마을 제장과 그 앞 백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 동강 물골의 비경 1번지, 제장
동강은 감입곡류(嵌入曲流·구불구불한 골짜기 안을 따라 흐르는 하천)의 사행천이다. 물골이란 사행천의 골짜기다. 물골에는 곳곳에 강마을이 있다. 해매, 점치, 소골, 제장, 연포, 가정, 진탄, 문산, 만지, 섭새, 목골, 삼옥, 덕포…. 모두 동강 물골의 강마을이다. 이 마을은 특징이 있다. 거개가 뼝대와 마주한 물돌이에 자리 잡았다.
뼝대와 물돌이는 동전의 앞뒷면. 뼝대는 강물의 공격으로 바위산이 깎여 나간 흔적이고 물돌이는 깎여 나간 돌과 흙이 강물에 실려와 쌓여 이뤄진 땅이다. 물돌이는 비탈뿐인 물골안의 유일한 평지이자 유기물이 풍부한 퇴적층이다. 그러니 농사 짓기에 그만이다. 선사 인류가 동강에 진출한 이유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동강은 신석기시대부터 한반도 인류가 터전을 이룬 곳이다.
그 흔적은 제장마을에도 있다. 강안의 한 고추밭. 그 한가운데서 고인돌이 발견됐다. 그 제장마을에는 다리가 놓여 있다. 그래서 자동차로 편히 오간다. 최근에는 펜션도 몇 채 들어섰다. 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이곳은 줄 배로 오가던 오지였다.
마을 모습은 특별하다. 강안으로 살포시 경사를 이룬 구릉은 고추며 콩 수수가 쑥쑥 자라난 밭이다. 하지만 그 앞뒤는 험준하다. 뒤로 백운산이, 앞으로 뼝대. 그 벼랑은 스위스 알프스의 아이거 북벽을 빼닮았다.
뼝대는 ‘하늘 벽’이라고도 불린다. 수직으로 치솟은 절벽은 강변에서 보면 고개가 아플 정도로 높다. 그 벼랑 끝을 보라. 보기에도 아찔할 만큼 위험해 보인다. 그러니 이곳을 트레킹한다면 지레 겁먹을 만도 하다. 하지만 기우다. 보기보다는 어렵지 않다. 대개 20분 정도면 뼝대의 에지, 벼랑의 가장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게서 동강 물골의 기막힌 비경을 감상하는 호사를 누린다.
○ 동강의 최고 비경 간직한 칠족령
그 길을 찾아 제장마을로 들어섰다. 고추밭에 이르자 매캐한 향이 코와 눈을 동시에 찌른다. 시위 현장의 최루가스를 생각나게 했다.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콩밭, 거무죽죽하게 변한 빨간 수수가 가을하늘과 극적 대비를 이뤘다. 곳곳에서 보랏빛 나팔꽃이 잎을 펼쳤고 백사장에서는 메뚜기가 힘차게 도약했다.
산길은 가팔랐다. 그래도 힘들지는 않았다. 요령을 터득한 결과다. 요령이란 ‘타박타박’이다. ‘F=ma’(힘은 질량과 가속도에 비례한다)라는 공식은 산에서도 유용하다. ‘천천히 오르면 힘이 덜 든다’는 진리가 내포돼 있다.
한참 오르면 성황나무에 이른다. 예가 칠족령(漆足嶺)이다. 바위에 뿌리를 박은 듯 성황나무는 바위를 움켜쥔 듯한 형상이다. 제장에서 오르다보면 이런 모습을 흔히 본다. 석회암 지대이기 때문에 가능한 형상이다. 성황나무 밑동을 보자. 수많은 돌탑이 장식하고 있다. 언제부터일지 모를 옛날부터 이 산길로 오가던 행인이 안전을 빌며 쌓은 것이리라.
고개는 두 마을을 잇는 산길이다. 칠족령은 동강변 문희마을 주민이 제장에 장보러 오갈 때 이용하던 길이다. 칠족령은 그 자체가 뼝대의 벼랑마루다. 거기에 기막힌 장소가 있다. 동강 물골이 훤히 내다보이는 뼝대마루의 전망대다.
나는 예서 한참이나 말을 잃었다. 동강의 감입곡류와 물골의 물돌이 풍경을 이렇듯 온전히 감상할 수 있는 곳을 보지 못해서다. 어째 이런 곳이 나 같은 여행전문기자에게까지도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최고는 한반도 지형을 그대로 빼닮은 물돌이 모습이다. 물돌이를 한반도로 보았을 때 전망대는 제주도 위치다. 거기서 북으로 올려다보면 더더욱 놀란다. 백두산 위치에 뾰족 산 하나가 자리를 잡은 것이다. 영월, 정선에 이런 곳이 이미 몇 곳 알려진 터이지만 이렇듯 완벽한 모습은 이곳뿐일 듯했다. 게다가 이곳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답지이니 찾는 이의 감흥은 더더욱 남다르리라 생각한다.
○ 뼝대 마루로 걷는 트레킹
동강물골 뼝대마루 트레킹은 이 칠족령이 출발점이다. 먼저 전망대에서 서면 내가 갈 코스가 확인된다. 왼쪽(제장)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물을 따라 둘러보자. 물돌이 정면의 마을이 바세고 그 뒤로 소사가 있다. 오메가(Ω) 형태의 물돌이를 돌아 동강은 오른쪽 시야의 끄트머리에서 문희마을을 향해 유턴하느라 사라진다. 그쯤에 다리가 있는데 연포마을이다.
트레킹은 이 칠족령을 떠나 물골의 뼝대마루 가장자리로 난 산길을 따르다가 산을 내려가 연포마을까지 이어진다. 거리는 6km며 2시간 반 정도 걸린다. 뼝대 마루를 걷기는 해도 늘 칠족령과 같은 비경이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울창한 숲과 나무에 가려서다. 하지만 틈틈이 시야 트인 공간도 만나니 걱정할 일도 없다. 그때마다 감상 위치도 바뀌어 매번 다른 모습의 물돌이 비경을 감상한다. 이종승 사장과 나는 트레킹하면서 각각의 위치를 이렇게 불렀다. 변산, 여수, 거제, 포항 등등…. 동강 뼝대 벼랑마루 트레킹에는 한반도(남쪽)를 2시간 반 만에 서해와 남해, 그리고 동해에서, 그것도 공중에서 조망하는 기막힌 호사가 담겨 있었다.
뼝대 벼랑의 산을 내려서면 다시 문명(文明)으로 회귀한다. 연포마을이다. 이정표에는 ‘거북이마을’이라고 쓰여있다. 지나던 도중 한 집에 들러 물 한 모금을 청했다. 그랬더니 컵 가득 머루주스를 따라주는 것이 아닌가. 마당을 덮은 덩굴에 주렁주렁 달린 산머루, 그 덩굴 그늘 아래 광주리에 한가득 담긴 산머루로 직접 담근 주스다.
콩밭 지나 강가로 내려서자 거대한 그림자 드리운 느티나무 거목이 보인다. 게서 한 할머니가 우리를 맞는다. 밥은 먹고 다니느냐는 인사말로. 그 거목 앞에 말끔하게 페인트칠로 새단장한 자그만 초등학교가 있다. 그 아래 강변에는 세월의 무게만큼 짓눌려 내려앉은 낮은 지붕의 상점도 보인다.
여기다. 영화 ‘선생 김봉두’가 촬영된 곳이. 교사 뒤로 돌아가자 김봉두 선생의 관사가 나무그늘 아래 있다. 이곳은 예미초등학교의 연포분교. 1999년 폐교 때까지 30년 동안 단 169명이 졸업한 오지분교다. 주민들은 폐교사를 펜션으로 개조했다. 곧 영업할 계획이란다. 강냉이 막걸리가 생각나 물었다. 요즘 강냉이 막걸리는 없고 정선 아라리 막걸리가 있다며 아래 상점을 가리킨다. 1960대 초반까지 뗏목을 몰던 떼꾼들을 상대로 밥과 술을 팔던 곳이다. 동강은 이렇듯 아직도 살아있다.
정선=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트레킹 정보|
◇찾아가기 ▽제장 마을:영동고속도로∼만종분기점∼중앙고속도로∼제천 나들목∼국도38호선∼예미∼예미초교∼제장 ▽버스:마을버스(신동읍 출발)는 제장마을 부근 고성까지만 운행.
◇트레킹 코스 ▽거리:6km(제장∼연포마을), 2시간 반 소요. ▽출발 점:제장마을 ▽난이도(1∼5): 2정도. ▽촬영장비: 16mm 광각렌즈(물돌이 촬영시).
◇맛집 ▽곤드레나물밥(본가식당): 여주인 김미자 씨가 봄에 뜯어 보관해온 나물을 들기름을 넣고 볶은 뒤 쌀밥을 지어내는 14년 역사의 곤드레나물밥(사진) 집. 된장찌개, 두부, 물김치 등과 함께 한상차림으로 낸다. 6000원. 한 시간 전 주문 필수. 신동읍 예미리 685-1, 033-378-3636
◇트레킹 여행상품
승우여행사(www.swtour.co.kr)는 하루 일정으로 제장나루∼하방소∼칠족령∼연포마을∼물레고개로 이어지는 동강 뼝대 벼랑마루 트레킹을 운영. 점심식사는 본가식당(곤드레나물밥). 출발은 27일과 10월 10일∼11월 21일 중 토, 일요일. 3만9000원. 02-720-8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