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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순서가 골인 순서” 싱가포르 F1 ‘죽음의 코스’

입력 | 2009-09-28 14:28:00



27일 오후 8시(현지시간) 싱가포르에서 열린 포뮬러 원(F1) 그랑프리. 최고의 자동차와 레이싱 팀을 가리는 F1 경기 중 유일하게 조명을 밝혀 놓고 밤에 열리는 이 경기는 지난해 첫 대회 때 △추월하기 힘든 좁은 도심도로로 '예선성적이 곧 결승 성적이다'라는 오명과 △르노 팀의 승부조작 사건으로 얼룩졌다. 이로 인해 F1 유일의 도심 야간 코스로 시작한 싱가포르 그랑프리는 시작과 동시에 '악몽의 레이스'라는 별명을 얻어야했다.



싱가포르는 지난해 오명을 벗기 위해 올해에는 상당 수 코너의 각도를 예리하게 고쳐 F1 머신들의 속도를 줄이도록 유도, 코스 내에서 추월하는 모습이 자주 보이도록 하는 등 대회 운영에 보다 많은 신경을 썼다.

국내 프로야구처럼 1년간 여러 차례 시합을 치른 뒤 승점을 더해 연말에 최종 우승자를 가리는 F1 그랑프리. 총 17개 대회 중 지난 13일 이탈리아에서 13회까지 마친 올해 대회는 이미 그동안 누적 점수로 이미 순위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었다. 27일 경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28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F1 그랑프리에서 ‘파나소닉 토요타’팀이 레이스 도중 머신 점검과 타이어 교체, 연료 주입 등의 작업을 하는 모습. DSLR 카메라의 연사기능을 이용해 촬영한 것을 GIF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다. 싱가포르=나성엽 기자 cpu@donga.com



악몽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날 싱가포르 F1 그랑프리는 이변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그동안 종합 성적 4위를 달려온 레드 불스 팀 소속 마크 웨버(33)는 경기 전 트랙의 상태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지난해보다 코너가 좀 예리해 졌지만 여전히 추월이 어려워 예선 성적순으로 출발한 머신들이 순서에 큰 변화 없이 골인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싱가포르 F1에서 순위를 결정짓는 것은 실력이 아니라, 누가 실수를 하느냐"라고 덧붙였다.

그는 그리고 자신이 한 말의 희생자가 됐다.

웨버는 레이스 도중 차량 소모품 교환과 연료 공급을 위해 잠시 '피트'(레이스 도중 자동차를 정비하는 장소)에 머문 뒤 출발했으나 정비팀원들 사이의 사인이 맞지 않아 연료 공급 호스를 차에 꽂은 채 출발하다 급정거해야 했다.

연료주입구에 꽉 낀 호스를 빼느라 다시 10여초가 허비됐고 100분의1초 단위로 승부가 갈리는 F1 그랑프리에서 그가 머신을 모는 레드 불스 팀은 순간 레이스에게 크게 뒤쳐졌다.

연료 주입 호스에도 이상이 생겨 레드불스 정비팀원들은 한 동안 호스에서 새어 나와 땅으로 떨어지는 연료를 걸레로 닦았다.

정작 치명적인 실수는 그 다음이었다. 경기가 중반에 접어들 즈음 피트에서 두 번째 정비를 마친 웨버의 머신 뒷바퀴에서 시커먼 연기가 솟으며 균형을 잃었다. 그리고 뒷바퀴가 눈에 띄게 삐뚤어진 상태로 도로 중간에서 빙그르 돌며 뒷면으로 트랙 옆 보호대를 들이 받고 멈춰 섰다.

그리고 수리 불능 상태로 머신이 망가지자 그는 이번 대회를 포기해야 했다.

잠시 후 피트에서 있었던 상황을 찍은 영상이 다시 한번 경기장 스크린에 상영됐다. 정비팀원 중 한명이 방금 출발한 웨버의 머신 뒷바퀴 부분에서 부품 중 일부가 떨어져 나온 것을 손으로 집어 들고 망연자실해 하는 표정이 그대로 경기장에 방영됐다.

이날 경기에서는 웨버 외에 전체 20명의 드라이버 중 제이미 알구어수아리(19), 세바스티안 부에미(20), 아드리안 수틸(26), 닉 하이트펠트(32), 로맹 그로쟝(23) 등 5명이 실격으로 순위권에 들지 못했다.

특히 포스 인디아 팀의 수틸은 토로 로소 팀의 알구어수아리를 무리하게 추월하는 과정에서 BMW 자우버 팀의 닉 하이트펠트와 충돌했다.

웨버의 말대로 싱가포르의 코스는 여전히 '출발 순위가 골인 순위'가 될 만큼 길이 좁고 벽이 높아 코스 내에서 추월이 수월하지 않았지만 수틸은 추월을 시도하다가 결국 사고를 낸 것.

수틸의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정상적인 경기 진행이 불가능해지자 세이프티 카(Safety Car)가 트랙에 등장했다.

세이프티 카는 사고를 수습하는 동안 일정 속도로 머신들 앞을 달리는 게 임무. 이때 머신들은 사고 당시 순위의 순서를 지키며 사고가 수습 될 때까지 세이프티 카를 뒤 따라 천천히 트랙을 돌아야 한다.

약 10여 분 간 계속된 세이프티 카의 리드가 끝나자 머신들은 다시 굉음을 내며 순위 다툼에 나섰다.

하지만 이번에도 레드 불스팀에 불운이 닥쳤다. 그동안 종합 성적 3위를 달려온 세바스티안 베텔(22)이 피트 부근에서 규정 속도를 지키지 않고 벌칙을 받아 트랙에서 한 차례 더 벗어나 피트에서 쉬어야 했다. 최고시속 300Km로 기록을 따지는 F1에서 벌칙은 치명적.

결국 종합성적 3, 4위를 달려온 레드불스의 두 드라이버가 한 명은 실격, 3등을 달려온 한 명은 4위라는 성적에 만족해야했다.

27일 열린 싱가포르 F1 그랑프리에서 1위로 골인한 해밀턴이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다. 싱가포르=나성엽 기자

이날 싱가포르 그랑프리 최후의 승자는 맥라렌 메르세데스를 운전한 루이스 해밀턴(24). 예선전에서 기록이 좋아 이날 결승전에서 가장 앞줄에서 출발한 해밀턴은 초반부터 그를 강력하게 견제한 베텔과 니코 로스버그(24·AT&T 윌리엄스팀)가 벌칙을 받으며 '알아서 뒤쳐져 주는 바람에' 편안하게 승리를 거머쥐었다.

종합순위 1위를 달려온 젠슨 버튼(28·브라운 GP F1팀)과 종합순위 2위인 루벤스 배리첼로(37·브라운 GP F1팀)는 각각 5, 6위로 피니시 라인을 통과했다.

버튼과 첼로는 승점에서 다른 드라이버들은 이미 크게 앞서 있어 올해 종합우승 하는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예상.

한편 싱가포르 F1 그랑프리 코스에서는 이날도 베텔의 머신이 코너를 돌던 중 벽에 사이드 미러가 부딪혀 파손돼 수리를 받기 위해 피트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등 드라이버들이 도심 속 높게 쌓여진 벽 사이로 아슬아슬한 레이스를 펼쳤다.

출범 첫 해 승부조작으로 '악몽의 레이스'라는 별명을 얻은 싱가포르 코스는 이번에는 드라이버들 사이에서 '죽음의 코스'라는 또 다른 별명을 얻을 수도 있다는 게 행사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내년 전남 영암에서 국내 처음으로 열리는 '2010 F1 코리아 그랑프리'는 벌판에 새로 지어지는 서킷 코스인 만큼 싱가포르와 같은 악명을 얻을 가능성은 희박에 보인다. 하지만 까다로운 F1 규정에 맞춰 대회 운영과 시설 마련에 만전을 기하지 못할 경우 출전 팀과 팬들의 불만을 살 수도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싱가포르=나성엽기자 cp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