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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역사]서울 종로구 관철동 삼일빌딩

입력 | 2009-09-30 02:57:00

서울 종로구 삼일빌딩은 1970년 한국의 대도시 마천루 시대를 연 31층 오피스빌딩이다. 루트비히 미스 반데어로에가 설계한 미국 뉴욕 시그램 빌딩과 닮은 점이 많다. 원대연 기자

1980년 촬영한 삼일빌딩 전경. 1985년 여의도 63빌딩이 생기기 전까지는 한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교통의 발달로 인구의 이동이 늘어나고 도시가 교외로 크게 확장되면서, 20세기 사회는 ‘전용 주택’과 ‘오피스 건물’이라는 두 가지 건축 유형을 새로 만들어냈다. 오피스 건물은 도시 속의 집적된 일터로, 전용 주택은 도시 밖의 독립된 생활을 위해 필요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근대도시의 ‘직주분리(職住分離·직장과 거주지가 떨어져 있는 것)’ 현상은 이렇게 나타났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장소 사이의 거리를 축소했으며 특정 장소가 지니는 의미도 사라지게 했다. 그 결과 근대 도시의 공간은 점차 균질해져 갔다. ‘균질공간’은 건축을 비롯한 근대 도시 전반을 지배한 공간의 개념이었다. 》

31층 자부심… 70년대 마천루시대 열다

고도성장-산업화 열망의 상징
발전하는 국가 이미지와도 연결

독일 근대건축의 거장 루트비히 미스 반데어로에가 유리로 만든 직육면체의 고층 오피스 건물을 통해 선보인 ‘균질공간’은 이런 근대 도시의 생활 문화를 건축으로 구현한 것이었다. 오늘날 대도시를 메운 고층 오피스 건물은 사무 기능을 갖춘 공간인 동시에 도시의 구조적 특징을 표현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삼일빌딩은 반데어로에가 설계한 고층 오피스 건물인 미국 뉴욕 ‘시그램 빌딩’과 형태와 비례가 비슷하다. 단정하면서도 추상적인 형태로 만들어진 이 건물은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해 1970년에 완공했다. 지어진 지 벌써 39년이 됐지만 아직도 주변 어느 건물 못잖게 기품 있고 세련돼 보인다.

삼일빌딩은 한국의 ‘마천루 시대’를 연 주인공이다. 1985년 서울 여의도 63빌딩이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서울의 발전을 상징했다. 18층 서울 중구 남대문로 조흥은행 본점 건물이 우뚝해 보였던 시절, 31층 삼일빌딩은 이보다 무려 13층이나 높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남산 1호 터널을 빠져나와 지금은 없어진 청계고가도로를 넘어갈 때 곧장 눈앞에 들어오는 것이 이 건물이었다. 삼일빌딩은 그렇게 고도성장을 상징했던 남산 터널과 청계고가도로와 늘 맞물려 각인됐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이 건물이 경제 성장의 자랑으로 실려 있었고, 건물 맞은편 도로에는 걸음을 멈추고 서서 이 건물의 층수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세보는 사람이 많았다. 옛 화신백화점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삼일빌딩 층수를 헤아리는 게 서울의 관광 코스일 정도였다. 고도성장과 산업사회를 꿈꾸던 당시 한국 사회가 삼일빌딩에는 오롯이 배어 있었다.

삼일빌딩의 31층은 3·1절을 상징한 것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최고층 건물을 통해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겠다’는 뜻으로 31층을 지으라 했다고 알려졌다. 이 건물의 소유주는 철과 특수강을 생산하면서 방위산업체로 급성장했던 삼미그룹이었다. 건축주는 ‘철과 유리로 만든 건물’을 설계해 주기를 요구했다고 한다. 국내 기술력을 믿지 못해 외국에 설계를 맡기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건축주의 의지로 결국 한국인 건축가(김중업)에게 의뢰했다. 덕분에 삼일빌딩은 한국인 건축가와 한국의 기술로 만들어진 최초의 고층 건물이 됐다.

철골조에 검은 색조 유리로 마감한 삼일빌딩의 내부는 뒤에 지어진 인근 오피스 건물에 비해 오히려 더 넉넉해 보인다. 수평 구조부재인 보를 뚫어 공기조화장치를 배열한 덕분에 천장 높이를 확보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건물의 외양도 둔하지 않고 날렵해 보인다.

삼일빌딩은 근대 도시의 격변하는 보편 공간을 ‘근대화=일제 청산’이라는 자부심 가득한 가치관으로 번역한 우리 시대의 아이콘이다. 이 건물의 형태, 건설 기술, 고층 건물을 소유한 기업과 도시 이미지가 발전하는 국가의 힘을 표현했다. 삼일빌딩에는 오피스 건물의 용도를 뛰어넘은 우리 시대의 한 단면이 새겨져 있다. 좋은 건축물은 한 사회의 역사와 자부심 넘치는 기억을 묵묵히 전하는 증거물로 여러 시대의 사람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이다.

김광현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⑬회는 김성홍 서울시립대 교수의 ‘서울 서초구 고속터미널과 센트럴시티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