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신 회장(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이 미국 유학 기간에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화학과 동기들과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제공 애경그룹
잠 못 드는 고학생
전액 장학금 받고 美유학길
익숙지 않은 영어 수업 따라가려
1년 동안은 누워서 잔적 없어
집안은 기울 대로 기울고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5남매의 막내였던 나는 돈을 들이지 않고 대학을 가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렇게 어려운 시절, 내가 다니던 경기여고 박은혜 교장선생님은 인생행로에 결정적인 길잡이가 돼 주었다.
박은혜 선생님은 공부는커녕 생존 자체가 삶이었던 6·25전쟁의 열악한 여건에서도 여고생을 대상으로 대학교수 초청강의를 마련했고, 외국에 유학할 기회가 있다면 누구든 시험을 치러 보라고 적극 권장할 정도로 신(新)여성이었다.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으로 전쟁 직후의 암담한 실정에서도 1955년 경기여고 졸업생 중 외국으로 유학을 떠난 학생이 30여 명이나 됐다.
선생님은 이공계 전공자에 한해 장학금을 지원해 주는 국비유학을 학생에게 권했다. 장학금이라는 말에 솔깃해진 나는 문교부(현 교육과학기술부)와 외국대사관에서 주관하는 시험에 친구들과 함께 응시했고 가장 먼저 합격했다.
미국 대학 가운데서 이공계 전공자에게 전액 장학금(숙식비 포함)을 주겠다는 필라델피아의 체스넛힐 대학으로 유학을 결심했다. 나는 가톨릭 신자였고 체스넛힐 대학은 가톨릭 재단의 여자대학이어서 나를 포함한 가족 모두 여러모로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당시에는 미국에 무슨 대학이 있고 무슨 대학이 좋은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체스넛힐 대학도 신부님이 알려주었다.
이공계 전공 가운데 화학을 고른 것은 내가 좋아하는 과목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택한 전공은 뒷날 내가 회사를 경영하는 데 절대적으로 도움이 됐다. 유학을 결심한 때는 그렇게 내 운명이 결정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1955년부터 1959년까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길고도 험한 유학생활을 하게 됐다.
지금이야 미국에 갈 때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나절 남짓만 보내면 중간 기착 없이 편안하게 날아가지만 당시에는 달랐다. 여의도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갔고, 일본에서 하와이로, 하와이에서 뉴욕으로, 뉴욕에서 학교가 위치한 필라델피아까지 긴 여정을 거쳐야 했다.
일반적인 방법은 배를 타고 가는 것이었다. 한 달 넘게 망망대해 태평양을 건너야 하지만 가격이 저렴한 배를 이용하는 방법을 유학생은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 때에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갈 수 있었다는 경험만으로도 참 다행이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여학생이 생전 처음 낯선 미국 땅까지 혼자 떠나는 유학길은 멀고도 무서웠다. 내가 들고 간 비행기 티켓은 편도용이었다. 마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먼 길을 돌아 도착한 미국 필라델피아의 여유롭고 풍요로운 환경은 가난에 찌든 고국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 여유가 가난한 나라에서 온 유학생 소녀를 더욱 주눅들게 했다.
체스넛힐 대학은 1924년에 개교한 가톨릭계 여자대학이다. 나는 개교 이래 최초로 입학한 동양인이었다. 미국으로 유학 온 한국 학생은 대부분 구내식당에서 접시를 닦는 등 힘든 일을 하면서 학비를 벌었다. 나는 전액 장학금을 받았으므로 다행히 학비를 벌기 위한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다.
그렇지만 기숙사와 식사를 제공하고 학비를 면제해주는 전액 장학금은 공짜가 아니었다. 모든 과목에서 평균 B학점 이상을 유지해야 혜택을 계속 받을 수 있었다. 혜택을 받지 못하면 공부를 계속하기 힘들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던 만큼 학점을 따내기 위한 내 노력은 피눈물이 날 정도였다.
영어라는 외국어가 익숙지 않았던 유학 초기 1년간은 옷을 벗고 누워서 잔 적이 없었다. 깊은 잠에 빠지면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아 책을 베고 책상에 앉아서 새우잠을 잤다. 일요일에도 아침 미사가 있을 때까지 도서관에서 지내며 하루 24시간 가까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