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신 회장(왼쪽에서 두 번째)이 1959년 미국 유학 당시 학교 합창단 공연을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합창단 활동은 유학 시절의 외로움을 달래는 행복한 탈출구였다. 사진 제공 애경그룹
구호물자 패션
대학 창고에 한국행 구호물자
유학 4년간 옷 마음껏 골라입어
신발 한짝 하루종일 찾기도
전공 서적에 언어보다는 기호나 숫자 등 만국 공통어가 많아 다행히도 수업을 따라갈 수는 있었다. 그 대신 실험이 많아서 실험실에 혼자 남아 여러 가지 실험을 복습하곤 했다. 남만큼 해서는 우수한 성적을 받기 힘들므로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했다. 학교에서는 학생 혼자 실험실을 쓸 수 없도록 규정으로 못 박아 놓았다. 혼자 실험을 할 수 없어 걱정하는 나를 보고 패트릭 머리라는 수녀 교수가 실험을 도와줬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뜻을 이루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지각 한 번, 결석 한 번 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한 덕택에 나는 곧 정상궤도에 올라설 수 있었다. 미국 친구도 많이 생겼다. 1950년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는 한국인은 물론이고 동양인이 거의 없어서 룸메이트나 학교 친구들은 동양인 자체를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신기하게 쳐다봤다. 미국 친구들은 한국인이든 중국인이든 일본인이든 동양인은 다 똑같이 생겼다고 했다. 그런 점은 서양인을 보는 나도 마찬가지여서 유학 초기에는 친구 얼굴을 잘 익히지 못했다.
우리 학교가 가톨릭 계열이어서 그런지 매사에 도움을 주려는 좋은 친구가 많았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일에 열심히 노력하는 내게 동료의식 이상의 감동을 받은 듯했다. 서양 사람에게 뒤지지 않는 체격과 적극적인 성격도 내가 그들과 동등하게 활동하는 데 도움이 됐다.
나는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는 4년 동안 단 한 번도 한국식으로 식사를 해본 적이 없다. 내가 학교 최초의 동양인 입학생이다 보니 한글을 사용할 기회조차 거의 없을 정도로 외로웠다. 방학에도 경제사정상 한국 방문이 여의치 않아 기숙사, 도서관, 실험실을 옮겨 다니며 생활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동포가 많이 살지 않는 곳에서 유학생활을 했기 때문에 나태해질 수 있는 마음을 다잡고 더 열심히 공부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유학생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옛날 일이지만 말이다.
학교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하고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게 된 유학 2년차 즈음부터 주말이면 미국 친구의 초대를 받아 파티에 참석하고 함께 놀러 다니는 여유를 갖게 됐다. 친구들과 쇼핑센터를 찾아다니긴 했지만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나는 눈요기 쇼핑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사실 쇼핑할 물건도 없었다. 먹고 자는 것은 기숙사에서 다 해결했다. 옷이 문제였는데 한국으로 가는 구호물자가 산더미처럼 쌓인 대학 지하창고에서 마음껏 고를 수 있었다. 내가 다니던 대학이 한국으로 보내는 구호물자를 모집했으므로 6·25전쟁을 치른 한국으로 향하는 구호물자가 항상 모여 있었다. 내 체격이 평균적인 미국인과 비슷해 바지와 블라우스 스커트 구두까지 그냥 골라 입고 신으면 됐다. 보통 체격의 한국인이었더라면 가져와 줄이거나 고르기 힘들었을 텐데 그런 수고가 없어 다행이었다. 유학 시절 내 패션은 구호물자로 완성한 게 대부분이었다.
어느 날, 학교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인 구호품 중에 너무 마음에 드는 신발을 한 짝 발견했다. 그런데 나머지 한 짝이 보이지 않았다. 신발 한 짝을 찾으려고 하루 종일 구호품을 뒤졌다. 미국에서 건너온 구호물자가 한국에 도착해서는 공짜가 아니라 시장에서 팔리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유학 뒤에 한국에 돌아와 들었다.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넘나드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불과 50여 년 전에는 이런 구호품을 받아 연명했던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에 격세지감이 든다. 전후 한국인이 고생한 것에는 비할 수 없지만 이토록 쉽지 않았던 유학 시절, 내가 미국 친구들보다 앞설 무기가 없는 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