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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칼럼/최영일]조지 오웰의 1984, 하루키의 1Q84

입력 | 2009-10-02 17:44:00


베스트셀러 작가가 돌아왔다.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다.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로도 출간되었다.)', '태엽 감는 새', '스푸트니크의 연인', '해변의 카프카' 등 전작들만으로도 그의 명성은 이미 아우라를 뿜는다.

그의 신작 1Q84는 일본에서 출간 당일 68만부가 팔려나갔고, 열흘 만에 100만부를 돌파했다. 이 정도면 출판계의 붐이 아니라 블록버스터 영화나 대중음악 플래티넘 앨범처럼 대흥행 현상임이 분명하다. 왜일까?

무엇보다 먼저 하루키의 소설에 대중들의 관심과 애정이 큰 것이 원인이다. 그렇게나 재미있을까? 하루키의 작품은 늘 잘 팔렸고, 잘 읽혔다. 하지만 평단은 문학적 깊이와 성찰의 문제를 늘 걸고 넘어졌다. 몰입시키는 '글빨'은 좋지만 다 읽고 나면 뭔가 허전하다는 거였다. 이번에 하루키는 미녀새 이신바에바처럼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문학적 장대높이뛰기에 도전했고, 보기 좋게 성공한 셈이다. 작품 1Q84를 뜯어보자.

● 또 다시 확인한 하루키의 힘

이야기는 두 캐릭터를 축으로 전개된다. 스포츠클럽에서 호신술 강사 겸 마사지 트레이너를 하는 아오마메라는 여성과, 입시학원에서 수학강사를 하며 그럭저럭 살아가는 덴고라는 남성이 주인공이다. 놀랍게도 이 둘은 홀수 장과 짝수 장을 번갈아가며 등장하는데 소설의 중반까지 한 번 스쳐 지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전혀 연관성도 드러나지 않는다.

자신들만의 세계에 평범하게 안주하고자 하는 이들은 이면의 세계에서 세상과 얽힌다. 사실 아오마메는 여성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남자들을 처단하는 킬러다. 한편 덴고는 수학의 아름다운 질서와 현실이 너무 달라 문학을 갈구하며 글쓰기를 하는 소설가지망생이다. 건강을 가르치며 살인을 하는 여자와 수학을 가르치며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남자. 작품의 배경인 1984년을 살아가는 이들은 기묘한 시공간인 1Q84의 세계로 빠져든다.

아오마메가 자신이 존재하는 공간이 그동안 살던 세계와 아주 살짝 뒤틀린 다른 곳이라는 가설을 세우면서 붙인 이름이 1Q84다. 1984년과 매우 흡사한데 '뭔가' 좀 다른 세계. 여기서 Q는 '의문'의 이니셜이다.

왜 1984년을 무대로 삼았을까?

저자 하루키는 명백히 조지 오웰의 현대고전 '1984'를 의식한 듯하다. 오웰이 1940년대에 쓴 1984는 '빅 브라더'가 세계를 통치하며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통제사회를 그려내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예언했다. 실제의 세계에서 정부조직의 과도한 확장이나 미디어의 발달, 특히 도,감청 기술이 개인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때 언론에 흔히 등장하는 용어가 '빅 브라더'이다. 하이테크를 활용한 이러한 개인의 위기감은 영화 속에서 다양하게 제시되었다. 본래의 뜻은 한 명의 강력한 독재자, 혹은 소수 통치집단을 의미하지만 개인의 권리가 강화되고, 민주주의의 공기가 확산된 현대사회에 과연 '빅 브라더'의 출현은 가능할까?

● 암울했던 조지오웰의 1984년, 그리고…

많은 세계인들이 1984년을 맞으면서 궁금해 했지만 정작 1984년은 조용히 지나갔다. 어언 25년이나 지난 현재 '빅 브라더'에 대한 하루키의 평가는 어떤 것일까? 그는 1Q84 속에 매우 대조적인 존재를 등장시킨다. 이름 하여 '리틀 피플.' 작가는 이야기의 끝까지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인간세계에 침투하려고 음모를 꾸미는 미지의 모호하고 신비로운 존재들로 그렸을 뿐이다.

딱 한 번 심리학자 칼 융이 언급되는 것을 단서로 삼는다면 '리틀 피플'은 사람들의 집단무의식을 형상화하고자 한 것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대중 위에 군림하며 개인을 통제하는 '빅 브라더'가 아니라 사회의 새로운 이념, 새로운 종교관 등 사회적 공감대를 넓혀 가면서 인간심리를 지배하고자 하는 그 어떤 존재들. 이들이 오웰의 '빅 브라더'를 대체해 하루키가 규정하고자 했던 '리틀 피플'일 것이다. 이들은 인간의 심리, 나아가 인간의 존재를 두 개로 분리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본래의 자아인 '마더' 외에 '도터'라 불리는 똑같은 존재를 복제하여 일종의 '숙주'로 삼는다.

사실 우리의 머리 속에도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살아가는 본체와 뭔가 나보다 강력한 어떤 존재나 대상에 의존해 살고가고 싶은 노예의식이 공존하고 있는 것 아닐까? 이처럼 소설 속에서 사회지도층과 엘리트들은 리틀 피플이 유도하는 신흥종교집단에 포섭되어 나간다. 반 리틀 피플 전선을 이뤄 싸우는 이들은 대부분 두 주인공 아오마메와 덴고를 비롯해 외롭고 힘없이 고립된 캐릭터들이다.

하루키가 창조한 1Q84는 달이 두 개 떠 있는 기묘한 세계로, 현실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판타지 장르가 분명하다. 하지만 하루키의 최대 강점인 리얼리티가 뛰어난 인물과 정황 묘사능력은 이 가상의 세계가 마치 바로 내 옆에 있는 듯한 데자뷰를 일으키고도 남음이 있다. 소설, 영화, 공연에서 훌륭한 작품의 기준 중 하나가 '조연'들의 생동감이다. 이들이 틈새를 매우면서 짜임새가 강해진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조연들은 모두 저마다 리얼리티가 뛰어나다. 시니컬한 모험가 편집장 고마쓰, 무미건조한 듯 신비로운 여고생 작가 후카에리, 자신의 권력과 재산을 비합법적 방식으로 여성보호에 쓰는 노부인, 사할린 출신 조선인으로 냉정한 보디가드이지만 속은 따뜻한 다마루, 운동권 출신의 공동체 지도자이자 신흥종교 교주인 후카다 등이다. 다양한 조연들의 포스가 이야기를 생동하게 만든다.

돌아온 하루키의 새 작품, 그것도 가상의 연도를 제목으로 한 1Q84가 2009년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무엇인가? 하루키 스타일의 제목으로 하면 우리는 2Q09의 세계로 빠져들지 모른다. 이것을 4차원, 5차원 등 다른 차원이 아닌 평행세계, 혹은 병렬세계라고 부른다. 이 책은 팔색조 같은 이야기 구조를 지니고 있다.

● 하루키 저작의 다층적 독해구조…

독자의 관심에 따라서 애절한 러브스토리로 읽힐 수도 있고, 블록버스터 액션소설로 보이기도 하며,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취재기록일 수도 있고, 정치사회에 대한 사상서나 삶에 대한 지혜를 암시한 새로운 종교관의 제시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하루키는 그것을 전적으로 독자의 몫으로 돌린다. 그는 작품 속에서 "소설가는 문제를 제시하는 사람이지,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러시아 작가 체호프의 말을 인용한다. 그리고 실제로 극의 결말에 가서까지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한 권의 책을 통해서 우리가 사는 현실이 과연 진실의 세계일까를 고민하게 된다. 이 작은 고민의 모티브만으로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치는 충분하다. 현대인이 자기세계에 매몰되고, 고립되고, 폐쇄되어 세상의 사건들과 담 쌓고 사는 '성실한 귀차니스트'가 되어 가는 현상에 대해서도 반성하게 된다.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 소중한 것들에 대해 찰라의 귀찮음 때문에 행동하지 않았다가 평생 후회하며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을까. 그리하여 하루키는 기존의 '쿨'한 이미지에서 다소 벗어나 이 소설 속에서 사회적 관계를 통해 회복해 나가야 하는 따뜻함에 대해 눈을 돌리자고 호소한다. (나는 그가 그렇게 호소한다고 느낀다.)

이 책은 독자가 확산되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따라 파장을 그리며 퍼져나가고 있다. 중요한 소재로 인용된 체코 작곡가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라는 연주곡은 일본에서 책 출간과 함께 음반판매가 급증했다. 조지 오웰의 '1984'와 안톤 체호프의 '사할린 섬' 기행 역시 잊혀진 명작에서 서점 판매가 급증했다고 한다. 이 작품 속에 비중 있게 언급된 탓이다. 그 밖에 장소에 대한 묘사와 오래된 재즈 명음반에 대한 해설을 곁들인 대목 등 이 소설은 독자들이 소설 내용에 등장하는 것들을 함께 찾도록 만드는, 작가 취향에 의한 PPL 요소가 뛰어나다.

이렇게 문장을 통해 독자들의 머리 속에 상황을 그려내도록 하는 탁월성은 하루키가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했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실상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를 '문학계의 왕가위 감독'이라 느낄 때가 많으며, 반대로 왕가위 감독의 '2046(이 또한 연도를 제목으로 한 작품이다)'같은 작품을 보면서는 '영화계의 하루키가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는 것이다. 소설과 영화의 경계를 허물고, 문장과 영상이 섞인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멀티-미디어-믹스의 세계에서 당연한 귀결이다.

우리는 이 작품을 읽으며 현실과 가상의 세계가 뒤섞임을 경계하게 되지만 그 구분이 어디 쉬운가? 우리는 이미 현실과 가상, 가상과 현실이 복합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하루키의 1Q84는 판타지가 아닐지 모른다. 극 중 아오마메와 다마루의 대화 한 자락.

아오마메가 말한다. "이건 현실세계이지 이야기가 아니라고요."

다마루가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한다. "그걸 누가 알지?"



최영일/ 문화평론가 vincent201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