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비누 출시를 앞두고 미리 신문 등을 통해 내보낸 광고. 보기 좋게 통통한 여성 모델의 모습을 통해 지금과 당시 아름다움의 기준이 조금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사진 제공 애경그룹
비밀의 방
집 목욕탕은 나만의 비밀장소
전세계 세제 놓고 직접 빨래실험
막내 키우며 ‘유아비누’ 아이디어
나이가 많이 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집에서 경영자가 아닌 주부로 돌아가 집안일을 가능한 한 직접 했다. 비누 회사를 운영하다 보니 특히 빨래만큼은 세탁기에 넣지 않고 손으로 직접 빨 때가 많았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이전에 살던 중구 신당동 주택에는 ‘비밀의 방’이 있었다. 나만의 은밀한 비밀 장소로, 가족 외에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곳이었다.
내 방에 딸린 작은 목욕탕인 이곳은 목욕탕이라기보다는 세제 가게처럼 온갖 세제 제품이 전시돼 있는 내 전용 실험실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매일 다른 세제와 비누를 직접 사용하면서 각 세제 제품의 특징을 비교하고 분석했다. 이곳에는 국내 비누·세제뿐 아니라 해외 주요국에서 사 온 비누와 세제가 쌓여 있었다. 제품을 직접 써보려면 빨래를 해 봐야 했기에 손빨래가 불가피했다. 가족들이 빨랫감을 내 놓으면 일반 주부에게는 ‘번거로운 일’이었겠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실험 재료’가 됐다.
온갖 세제를 쌓아 놓고 빨래하는 내 모습을 보면 빨래를 하다가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처럼 다양한 세제를 쓰면서 빨래하는 주부가 어디 있을까’ 싶어서였다. 매일 이렇게 빨래를 하다 보니 한동안 누가 나에게 “취미가 뭐예요?”라고 물으면 “빨래”라고도 했었다.
사람들은 어떤 자리에서 나를 소개할 때 흔히 ‘비누 만드는 사람’ ‘비누 여자’라고 하며 평생 비누는 실컷 써보겠다는 농담을 한다. 농담이 아니라 사실 더 나은 비누를 만들기 위해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 파는 비누를 대부분 원 없이 써 봤다.
이렇게 다양한 세제를 써보았기 때문에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제품은 자신 있게 소비자에게 권할 수 있었다. 직접 비누를 쓰다가 제품 아이디어를 내 시장에서 성공한 대표적인 비누가 ‘유아비누’다. 막내(현 채승석 애경개발 사장)를 목욕시키면서 “일반 비누보다 더 순한 비누가 있었으면 여린 아기 피부를 닦을 때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다가 유아 전용 비누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외국에서는 이미 ‘Baby Soap’이 성인용 비누와 별도로 판매되고 있었다.
‘유아비누’는 1974년 유아 또는 피부가 약한 사람을 위해 국내 최초로 탄생한 저자극성 비누다. 피부자극 접촉성 알레르기 반응을 최소화하기 위해 유기 알칼리 함량을 극소화해 만들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당시 이화여대 부속병원 피부과장을 맡고 있던 국홍일 박사팀에 의뢰해 100명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실시했다. 당시 실험 결과 유아비누는 피부자극이 ‘무시될 수 있는 정도’에 해당된다는 판정을 받았다. 유아비누는 지금도 판매되고 있는 애경의 대표적인 장수 제품이다.
유아비누는 ‘엄마랑 아가랑 함께 쓰세요’라는 가사의 광고 주제가와 함께 여성 모델이 상반신을 벗은 채 아기를 안고 있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광고로도 눈길을 끌었다.
당시 유아비누와 우유비누 등이 인기를 끌면서 애경 영등포공장(현 AK플라자 구로본점)은 KBS라디오 ‘오늘의 한국’이라는 프로그램에 소개되기도 했다. 한국 유지공업이 해외 시장에서 호평을 받으면서 현장을 직접 찾아가봤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방송 진행자는 영등포공장의 자동연속식 비누기계를 소개하면서 “불과 1초에 3개의 비누가 마치 눈송이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습니다”라고 보도했다. 국내 최초의 백색비누인 우유비누와 역시 하얀색인 유아비누가 기계에서 완성돼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눈송이에 비유한 것이다.
비누는 아니지만 ‘콜드크림’ 역시 여성이자 주부로 살아온 나의 경험을 토대로 태어났다. 콜드크림은 나뿐만 아니라 6·25전쟁 이후 우리나라 여성이 가장 먼저 접한 미국 화장품이다. 값이 싸기 때문에 얼굴에 듬뿍 발라도 부담이 적고, 테이프 등 접착제 자국이 묻었을 때 얼룩을 지우기 위한 용도로도 사용했다. 내가 처음 콜드크림을 본 것은 미국에서 유학할 때다. 친구 집에 초대 받아 가보면 집집마다 바세린 로션과 크림은 다 하나씩 두고 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국에도 그런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때의 꿈을 30여 년 만에 내 회사에서 생산하는 것으로 완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