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마지막 방송
“어떤 소중한 가치도 가꾸고 돌보지 않으면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허둥지둥 쫓기듯 살아가는 삶이라도 가끔은 안부를 물어볼 일이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안녕하시냐고….”
7일 서울 여의도 MBC 7층의 라디오 스튜디오(사진). MBC 표준FM(95.9MHz) 라디오 드라마 ‘격동 50년’의 해설을 맡은 성우 원호섭 씨가 마지막 대본을 읽자 녹음실에 있던 성우들은 모두 “수고하셨습니다”를 외치며 서로 껴안고 악수를 나눴다. 이로써 1988년 4월 1일 처음 전파를 타 21년간 방송한 ‘격동 50년’의 마지막 녹음이 끝났다. 마지막 방송은 이달 17일.
‘격동 50년’은 4·19혁명, 5·16군사정변, 10월 유신, 햇볕정책과 남북정상회담 등 한국 정치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거의 모두 조명했다. 연출을 맡은 오성수 PD는 “라디오 드라마에 대한 청취자의 관심이 줄었고, DJ 한 명이 진행하는 다른 프로그램과 달리 드라마는 회당 15명 내외의 성우가 필요해 제작비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고 말했다.
긴 세월 동고동락해 온 성우들은 프로그램 폐지에 대한 아쉬움을 숨기지 않았다. 박정희, 김영삼, 노무현 전 대통령 역의 이상훈 씨는 “잘 자라던 스물한 살짜리 아이를 멀리 떠나보내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입고 온 흰 티셔츠에 함께 연기한 성우들의 사인을 받았다. 장동건이 대통령으로 출연하는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에서 외교안보수석 역할을 맡기도 한 이 씨는 “장동건 씨에게 대통령 목소리를 들려주면 그가 ‘어쩌면 그리 똑같냐’며 놀라곤 했다”고 말했다.
‘격동 50년’의 주인공 연기는 베테랑 성우들이 맡았다. 1965년 MBC 성우로 입사한 황일청 씨는 첫 회부터 이 방송과 함께했다. 그는 “성우들에게는 TV 외화 더빙이 더 많은 수입을 가져다주지만, 라디오 드라마는 ‘내 것’이라는 상징성이 있어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역을 연기한 이철용 씨는 1996년부터 이 방송에 참여했다. 그는 “내가 연기하던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온 몸이 싸해지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안종국 씨는 1964년 동아방송 2기 출신. 그는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폐국된 동아방송의 ‘정계야화’에 이기붕 전 부통령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작가 이석영 씨는 “1980년대만 해도 라디오 드라마가 오전 오후 저녁 시간대에 모두 방송될 정도로 인기였는데 TV가 생기고 매체가 다양해지면서 더이상 관심을 끌지 못하게 됐다”고 말했다. ‘격동 50년’은 MBC에 남은 마지막 라디오 드라마였다.
이지연 기자 chanc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