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가 1931∼34년 문맹퇴치 및 한글보급운동 교재로 만들어 배포했던 ‘한글공부’의 표지.
아는 것이 힘 일제 금지령 속 “글장님 없애자”
《“어찌하면 우리는 하루 밧비 이 무식의 디옥에서 벗어날가. 어찌하면 이 글장님의 눈을 한시 밧비 띄어볼가.…이에 본사는 글장님 업세는 운동을 일으키고저 합니다. 경성 본사를 비롯하야 전 조선 삼백여처 지분국을 총동원으로 방방곡곡에 문맹타파의 횃불을 놉히 들가 합니다.” ―동아일보 1928년 3월 16일자》
1920년대 말, 식민지 조선의 문맹률은 약 90%. “고상한 학문과 해박한 지식은 고만두고라도 조선문으로 편지 한 장 쓰지 못하고 심지어 상회의 간판과 정거장의 이름 하나 몰라보는” 사람이 열의 아홉이던 시절이었다.
1928년 3월 16일, 하나의 선언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동아일보가 내세운 ‘글장님 없애기(문맹퇴치) 운동’이었다. 본사와 지국, 분국을 통해 전국에 선전 포스터를 내걸었고 3월 25일부터 ‘글장님 없애기 운동’의 행사 계획을 소개했다. 4월 2일에는 안재홍, 방정환, 최현배, 최남선 등 명사 30여 명을 초청해 강연회를 열 계획이었다.
한글 탄압을 통해 식민지 지배를 노렸던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3월 29일 문맹퇴치 운동 금지령을 내렸다. 이날 동아일보는 이에 맞서 ‘만반 준비가 완성된 금일, 문맹퇴치선전 돌연금지’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기사는 압수됐고 운동은 무산됐다.
그러나 문맹퇴치에 대한 열망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3년 뒤인 1931년 전국은 브나로드 운동의 물결에 휩싸였다. 브나로드 운동이란 19세기 러시아 지식인들의 농민 계몽운동을 가리키는 말로, ‘농민 속으로’라는 뜻.
동아일보는 1931년 7월 16일 ‘제1회 학생 하기(夏期) 브나로드 운동-남녀학생 총동원, 휴가는 봉사적으로’라는 기사를 통해 브나로드 운동의 기치를 올렸다. 운동의 핵심은 문맹퇴치와 한글보급 이었다.
1931년 첫해엔 62일 동안 학생계몽대 423명이 127곳을 돌며 한글 강습과 학술 강연 등을 펼쳤다. 동아일보는 ‘한글 공부’ ‘한글 맞춤법 통일안’ ‘신철자편람’ 등의 교재를 독자들에게 제공했다.
문맹퇴치 운동 내내 일제의 감시와 탄압은 계속됐고 결국 1935년부터 이 행사는 중단되고 말았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총 198일간 5751명이 1320곳에서 9만7598명에게 한글을 강습했다. 동아일보가 배부한 한글 교재는 모두 210만 부에 달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문맹타파가’를 함께 보급하기도 했다.
‘귀 잇고도 못 들으면 귀먹어리요/입 가지고 말 못하면 벙어리라지/…/낫 놓고 기윽자를 누가 모르리/창앳등 니은은 절로 알리라/…/하루 한 자 이틀 두 자 새새 틈틈이/이러구로 이켜가면 내중 다 알리.’
사람들은 ‘권학가’의 곡에 이 가사를 붙여 문맹퇴치를 노래했다. 문맹의 그늘에 갇혀 있던 1930년대, 브나로드 한글보급 운동은 문맹의 어둠을 걷어내는 한 줄기 빛이었다. 2008년 국립국어원의 ‘국민 기초 문해력 조사’에 따르면 한국 국민의 문맹률은 1.67%. 70여 년 전 문맹퇴치의 빛이 지금도 이 땅을 환히 비추고 있는 것이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