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하와이서도
인재 양성 뜻모아
《“관립(대학)에 재(在)하야 관료주의가 발호하고 민립에 재하야 민주주의가 발생하는 것은 일본의 실례가 역력히 증명하는 바며, 진리의 연구는 자유를 절대의 생명으로 하는 것이라. 그러나 관립에 재하야는 자유를 요구치 못할 것이니 (…) 대로를 조명하는 봉화를 거(擧)하랴하면 불가불 민립대학에 이를 구할 수밧게 무(無)하도다.”
―동아일보 1922년 2월 3일자 》
1923년 3월 29일 오후 1시 서울 종로구 중앙청년회관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462명의 인사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민립대학 기성회(期成會) 창립 발기인들이었다.
이들은 취지서에서 “생존을 유지하며 문화의 창조와 향상을 기도하려면 대학의 설립을 사(捨)할 수 없다”고 민립(오늘날의 사립에 해당)대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들은 “조선 1000만 민중이 1원씩!”을 구호로 1년 안에 1000만 원을 모아 법과, 문과, 경제과, 이과, 공과, 의과, 농과와 기타 학과를 설치하기로 결의했다.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민족의 손으로 민족의 인재를 양성하자는 오랜 염원에서 비롯됐다. 1907년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이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무의미해지자 민족주의 세력은 당시 모은 자금을 민립대학 설립에 쓰려 했으나 일제가 허가하지 않아 좌절됐다.
1919년 3·1운동 이후 새로운 민족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면서 무엇보다 교육운동이 시급하다는 목소리와 함께 민립대학 설립에 대한 여론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1921년 1월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김성수 송진우 유진태 오세창 등이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준비회를 발족하고 전국적으로 발기인 모집에 나섰다. 호응은 예상을 넘어 만주 간도지역과 하와이에서도 지부가 결성됐다. 이후 2년여의 준비 끝에 기성회까지 설립한 것.
1922∼1924년 동아일보에는 당시 이 운동의 진행 상황이 100여 건의 기사와 사설로 상세히 보도됐다. 창립 발기대회 기사에는 발기인 전체 명단까지 실렸다.
경기 안성에 살던 이정도 씨는 “조선 사람이 여러 가지 사업을 일으킨 가운데 민립대학기성운동이 가장 뜻있고 큰 운동”이라며 1923년 4월부터 24년 4월까지 매일 식구 수대로 한 숟갈씩 쌀을 모아 19원을 기부했다. 동아일보 1924년 4월 16일자에 실린 내용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1924년 중반을 기점으로 동력을 잃기 시작했다. 총독부는 ‘불온사상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기성회 임원을 미행하고 강연을 막았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경제가 불황에 빠지고 1923∼1924년 잇따른 가뭄과 홍수로 이재민 구호가 시급해지자 민립대학 모금은 지지부진해졌다. 결국 운동은 1925년 막을 내렸다.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민족운동으로서 3·1운동 이후 처음으로 전국적 조직을 이룬 운동이기도 했다. 놀란 일제는 서둘러 관립 경성제국대학(서울대 전신) 설립을 추진해 1924년 개교했다. 오늘날 한국의 4년제 사립대학 수는 150여 개, 재학생은 161만 명에 달한다. 민족의 힘으로 대학 한 곳 설립하는 것이 간절한 염원이었던 시절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