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앨런(왼쪽) 폴란스키. 동아일보 자료사진
영화 '맨해튼'(1979)에서 우디 앨런은 17세 여고생 트레이시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42세 TV 작가 아이잭 데이비스로 나온다.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손녀 마리엘 헤밍웨이가 연기했던 트레이시는 영화 말미에 앨런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열여덟이 됐어요. 이제 (우리 관계는) 법적이라고요. 난 여전히 어리지만…."
30년이 지난 현재 할리우드에서 미성년자와 불법 성관계를 맺는 '맨해튼' 식의 영화는 제작되기 힘들다. 미성년자 성추행은 용서받지 못할 중범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32년 전 13세 소녀와 불법 성관계를 가진 혐의로 최근 체포된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 사건이 미성년자 성범죄를 다루는 사회 제도의 변화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11일 보도했다.
사건이 일어난 1977년 당시 법제도와 사회 분위기에 비춰볼 때 폴란스키 감독이 도망치지 않고 법정에 섰더라면 48일간의 징역형을 선고받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미성년자 성추행 혐의가 인정될 경우 그는 최소 3년의 징역형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 미국 법조계의 설명이다.
지난 30년간 범죄 피해자 권리를 옹호하는 운동과 레이건 행정부 시절 시작된 가족의 가치를 복원하려는 움직임, 그리고 성직자들의 아동 성추행 범죄가 잇따르면서 미성년자를 상대로 한 성범죄를 엄벌해야 한다는 사회적인 공감대가 조성됐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폴란스키 감독 사건이 일어났던 1977년 즈음에는 미성년자 성추행을 대충 눈감아주는 분위기였으며 특히 연예계 인물이 연루된 경우엔 더욱 관대했다.
이에 따라 성범죄를 저지른 폴란스키 감독은 당시 '성범죄자'라기 보다는 영화 '맨해튼'에서 우디 앨런이 연기했던 인물 '데이비스'로 간주됐다. 데이비스는 극중 책임감 있는 사람이나 잠시 판단을 잘못해 어리지만 닳고 닭은 소녀와 성관계를 갖는 인물로 그려졌다.
실제로 당시 경찰과 법조계는 폴란스키 감독을 비난하면서도 △피해자에 대해 '또래보다 조숙해보이고 성경험이 있는 소녀'라고 언급하거나 △당시 사건은 우발적이었고 피해자 어머니가 딸을 폴란스키와 함께 지내도록 허락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스탠퍼드 대학에서 형법을 가르치는 로버트 와이즈버그 씨는 "요새 같으면 피해자의 태도(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는 등)나 성 경험을 언급하거나 이를 (형량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고려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폴란스키 감독의 처벌을 주장하는 '성직자에게 성추행당한 생존자 네트워크' 측은 "1970년대엔 당시 영화 '오멘'에서 볼 수 있듯 어린이를 어른의 감수성을 지닌 존재로 생각하는 분위기였다"며 "하지만 1980년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아이들을 그저 아이로만 바라보게 됐다"고 변화상을 설명했다.
우디 앨런은 현재 할리우드의 저명인사들과 함께 폴란스키 감독의 구명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미 연예계의 한 인사는 "세상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