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같은 인간
‘꿈의 공장’으로 불리는 미국 할리우드는 자신들이 생산 유통시켜온 ‘꿈’과 ‘환상’이란 가치상품을 의도적으로 해체하고 배신하는 방식으로 진화를 모색 중이다. 이런 움직임은 기존 할리우드 장르 문법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겐 신선함을 넘어 충격으로 다가온다. 첩보물 ‘본’ 시리즈가 그랬다. 평범하게 생긴 첩보원 제이슨 본이 땀내 폴폴 풍기는 ‘개싸움’을 해가며 종국에 맞닥뜨리게 되는 건 ‘나 역시 선량한 누군가를 죽여 온 살인자일 뿐이며 첩보원은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불편한 진실이었다. 들고 찍기(핸드 헬드)라는 사실적 방식을 통해 전달되는 본 시리즈의 이런 테마는 ‘미남 첩보원이 인류를 구하고 악당들을 잇달아 혼내준다’는 단순하고 낭만적인 내용으로 40여 년간 세계첩보영화시장을 독점해온 ‘007’ 시리즈에 대한 자기풍자고 반성이며 극복이었다(‘제이슨 본’이란 주인공 이름도 ‘제임스 본드’란 007 시리즈의 주인공 이름을 비꼰 것이다).
14일 개봉되는 ‘디스트릭트9’을 보면서 이런 할리우드의 진화를 생각했다. 비현실적인 소재를 현실적으로 바라보는 이 영화의 태도는 우스꽝스럽고 낯설다 못해 무섭다. 이 영화는 기존 외계인 소재 블록버스터들이 공고히 구축해 놓은 장르의 공식에 ‘똥침’을 날린다. 영화 속 외계인들은 신비롭지도, 전지전능하지도, 지구 정복의 야욕을 불태우지도 않는다. 단지 ‘쓰레기’처럼 쓸모없는 족속들로 비칠 뿐. 이런 전도(顚倒)된 외계인의 모습을 통해 관객이 직면하는 건 외계인보다 더 ‘외계인적’인 우리 인간의 못돼먹고 잔인한 자화상이다.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 불시착한 우주선에서 떼로 ‘기어 나온’ 외계인들을 인간들이 격리 수용한다. 20년이 지나면서 외계인 ‘난민촌’은 인류의 골칫거리로 전락한다. 외계인들은 쓰레기더미를 뒤지다 각종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세금이 투입되는 꼴을 참을 수 없게 된 사람들은 항의시위를 벌인다. 이들 외계인을 집단 이주시키는 임무를 맡게 된 외계인관리국(MNU) 소속 ‘비커스’는 우연히 외계물질에 노출되면서 외계인처럼 신체가 변형되는 고통을 겪는다. 정부는 비커스를 대상으로 잔인한 생체실험을 계획하고, 가까스로 탈출한 비커스는 외계인의 지구 탈출을 위해 목숨을 내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디스트릭트9을 올해 개봉된 SF영화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보는 이유는 이 영화가 관객에게 말을 거는 낯선 태도 때문이다. 실은 깊고 아픈 이야기를 하면서도, 겉으론 마치 우스꽝스럽고 대수롭지 않은 농담을 하고 지나가는 체하는 이 영화의 화법은 그 천연덕스러움 때문에 더욱 쇼킹하다. 외계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주인공 비커스마저도 모두 장삼이사(張三李四)를 슬쩍 바라보는 듯한 몰개성적인 태도로 바라봄으로써 영화는 인간의 모순과 잔혹성을 더 사무치게 전달한다. 소심했던 비커스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외계인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외계인보다 더 외계인적인’ 인간들과 맞서는 모습은, 그의 신체 변형만큼이나 고통스럽고 또 성스럽다. 살점이 터지고 사지가 절단되는 액션 장면은 스타일리시하고 통쾌하다기보다는 불편하고 고통스럽다.
결국 모든 문제의 원인은 인간의 한갓된 탐욕인 것이다! 신체 변형의 고통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인간과 맞서는 비커스의 모습에선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의 모습이 겹쳐진다. 이쯤 되면, ‘반지의 제왕’이나 ‘킹콩’을 연출한 피터 잭슨(그는 이 영화의 제작자다)이 왜 닐 블롬캠프라는 ‘초짜’ 감독에게 이런 거대한 프로젝트를 맡겼는지 알 법도 하다. 잭슨이 관심을 가지는 대상은 기괴한 괴물들이나 거대한 고릴라가 아니라, 이런 대상들을 통해 거울처럼 비춰보는 우리 인간의 원죄, 즉 탐욕이기 때문이다. 18세 이상.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