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올라갈수록 자리가 줄어든다는 의미에서 ‘피라미드 조직’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하지만 국세청 직원들은 스스로를 ‘압정 조직’이라고 부른다. 2만여 명의 국세청 직원 가운데 6, 7급 직원 수만 50%가량 된다. 그만큼 하위직 공무원이 많고 고위공무원단에 속한 간부는 31명밖에 안 되니 그런 말이 나올 법하다. 승진 관문이 바늘구멍 같아 한번 삐끗하면 승진 대열에서 탈락하기 일쑤다. 전군표 한상률 전 청장 당시엔 동기 세무서장들이 있을 정도였다.
직원들의 계급 분포만 놓고 보면 국세청을 권력기관이라고 칭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같은 권력기관으로 분류되는 검찰 조직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국세청을 권력기관으로 여기는 이유는 막강한 세무조사 권한 때문이다. “세무서에서 나왔습니다”라고 하면 잘못한 게 없어도 가슴이 철렁하는 게 보통 사람들이다. 국회의원이나 고위공직자 등 힘깨나 쓰는 사람들의 돈 정보를 쥐고 있는 것도 힘이다. 내부 결속력도 어느 조직보다 강한 편이다. 이게 정치권력과의 결탁으로 이어져 숱한 오점을 남긴 게 국세청의 역사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백용호 국세청장의 ‘권력기관 탈피’ 행보는 긍정적이다. 그는 7월 취임 이후 여러 석상에서 “국세청이 권력기관으로 거론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며 세무조사 권한으로 기업을 압박해오던 관행을 해소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지난달 세무조사의 예측가능성과 투명성을 높이겠다는 내용의 국세행정 개혁안을 내놓은 데 대한 시장의 반응도 현재로선 우호적이다.
다만 국세청을 ‘징세기관’으로 자리 잡도록 하겠다는 백 청장의 말에서 2%의 부족함을 느낀다. 그는 최근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국세청이 지나치게 권력기관이 된 것이 문제이며 징세기관으로서 역할에 충실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백 청장은 권력기관의 상대적 개념으로 순수하게 세정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임을 강조한 것이리라.
그러나 ‘징세(徵稅)’는 징용 징발 등의 단어와 같이 강제성이 내포돼 국세청은 여전히 ‘갑(甲)’이라는 인상을 풍긴다. 역사는 어떤 의미에서 세금을 더 많이 걷어가려는 자와 덜 내려는 자 간의 갈등과 투쟁의 연속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자발적 납세와 강제 징세는 영원한 모순 관계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정부는 납세자의 마음을 얻는 쪽으로 가야 한다. 그 기본은 공정과세일 것이다.
곧 취임 100일을 맞는 백 청장은 부드러운 카리스마형이라고 한다. 취임 후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위원들과의 첫 식사 자리에서 역대 청장들과는 달리 폭탄주를 돌리지 않고 와인을 마신 것이 회자되기도 했다. 언론사들의 인터뷰 요청에도 “세금을 걷는 집행기관의 장으로서 언론에 자주 노출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고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에게선 힘이 느껴진다. 이명박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실세’ 청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정치적 외풍(外風)의 차단막 역할을 자임했다. 과거에도 여러 청장이 취임할 때마다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줄줄이 감옥에 갔다. 핵심은 최고 권력자로부터의 독립성 확보다. 세정(稅政)을 세정(洗淨)해서 공정과세기관으로 거듭나라는 게 세정(世情)이다. 언론이 ‘4대 권력기관의 하나인 국세청’이라는 문구를 쓰지 않는 시대가 곧 오길 바란다.
정용관 정치부 차장 yonga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