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 콩트 번안극 ‘굿닥터’
재채기 한 번으로 인생이 바뀌어 버린 하급 공무원, 친구의 아내를 노리는 난봉꾼, 황혼의 로맨스를 꿈꾸는 할아버지, 빛바랜 영광을 붙들고 사는 퇴역 장교….
가난하고 서글픈 삶을 유쾌하게 보여주는, 연극 ‘굿닥터’의 주인공들이다. 미국 코미디 작가 닐 사이먼은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가 의대생 시절에 학비를 충당하기 위해 신문에 기고한 콩트를 엮어 희곡 ‘굿닥터’로 탄생시켰다. 이번 무대의 연출을 맡은 이대영 씨는 “과거의 틀에서 따스한 삶에 내재된 고통을 그린 작품이지만, 오늘의 고통과 본질적으로 한 치도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굿닥터’를 공연하는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는 100석 규모로 무대와 객석의 거리가 가깝다. 극을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작가’(정재환)가 “아, 벌써들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마침 글을 쓰기 좀 따분해서 차라리 누구랑 같이 앉아 얘기라도 했으면 하는 참입니다”라며 관객에게 말을 건다. 관객이 어둠 속에 숨죽인 제3자가 아니라 소통의 대상이 돼 극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한다.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라며 6편의 에피소드를 펼쳐 보인다. 간소한 서재처럼 보이는 무대는 잇따라 극장, 침실, 공원, 유곽, 은행의 사무실이 돼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놓는다. 작가 역을 맡은 방송인 정재환 씨는 이번이 첫 연극무대. 그는 상당한 분량의 대사를 안정적으로 소화해냈다. 수다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대사를 하면서도 발음이 또렷했다.
‘늦은 행복’은 가장 담백한 에피소드지만 기억에 오래 남았다. 한적한 공원 벤치에 앉은 남녀 노인. 서로 호감을 느끼지만 선뜻 말을 건네지 못하고 속마음을 노래로 부른다. “다시 한 번 인생을 노래하기에 나는 너무 늙었고 지친 게 아닐까.” “다시 한 번 행복을 찾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나. 사랑을 구하기에는 너무도 지쳐버렸을까.”
몇 번이고 주저하다 남자는 ‘뜨뜻한 차 한 잔’을 하자고 말을 건네고 여자는 흔쾌히 내일 마시자고 답한다. 두 사람은 퇴장하면서 함께 노래한다. “아직도 즐거운 시간을 약속할 수 있고, 내일의 행복과 사랑을 기다릴 수 있어. 하지만 물론 오늘은 아니고, 언제나 내일의 약속.”
단조롭고 간결하게 주고받는 대화와 노래 속에 담긴, 쓸쓸한 인생과 작은 희망은 울림이 있었다. 정아미 씨의 맑은 음성으로 부르는 서툰 노래, 이영광 씨의 그늘이 드리운 듯한 묵직한 저음이 조화롭다.
‘재채기’는 국가공원관리부 소속 관청의 말단 공무원 이반 체르디아코프가 주인공이다. 유일한 호사 취미로 로얄석에서 연극을 보다가 그만 앞자리에 앉은 공원관리부 장관의 뒤통수에 재채기를 하고 만다. 거듭 사과했지만 소심한 이 남자는 시종 좌불안석. 결국 장관의 화를 돋워 “세균 분무기 같은 놈. 넌 아무 것도 아냐, 알아?”라는 말을 들은 뒤 삶의 의지를 잃어 죽고 만다. 기죽여 살아가는 평범한 인생의 몰락에 씁쓸한 미소가 뒤따른다.
‘겁탈’과 ‘의지할 곳 없는 신세’, ‘생일선물’에서는 관객석에서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겁탈’에서 아름다운 기혼여성을 꾀어내는 ‘선수’인 피터는 “유부녀를 건드릴 생각이 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여자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여성을 처절히 무시함으로써 도리어 관심을 얻어내는 법을 단계별로 선보이면서, 인간의 본성을 경쾌하게 조롱한다. ‘의지할 곳 없는 신세’에선 신경쇠약에 걸린 떼쓰는 여인을 연기한 정아미 씨가 돋보였다. 11월 15일까지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 02-3672-3001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