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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권순택]5000원짜리 점심

입력 | 2009-10-16 02:55:00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학생들의 점심 도시락은 가정형편을 알 수 있는 쇼윈도였다. 학교에 도시락을 싸오느냐 못 싸오느냐는 물론이고 도시락을 싸와도 어떤 밥과 반찬이 들어있느냐에 따라 생활의 정도가 갈렸다. 흰 쌀밥에 계란프라이와 장조림 반찬 정도가 든 도시락은 최상급이었다. 보릿고개를 겪어본 50대 이상 세대 중에는 점심시간에 냉수로 주린 배를 채우고 학교 뒷산이나 운동장을 배회했던 추억을 간직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점심(點心)이란 말은 원래 하루 두 끼가 기본이었던 중국에서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마음에 점을 찍고 넘겼다’ 혹은 ‘간단한 음식’이란 의미로 사용됐다. 직장인들이 점심을 샌드위치나 도시락으로 해결하거나 직장 근처의 카페나 식당에서 사먹게 된 것은 산업화 시대의 산물이다. 직장과 집이 멀리 떨어지고 장시간 근로가 일반화하면서 아침과 저녁식사 사이의 허기를 해결하는 새로운 점심문화가 생겨난 셈이다.
▷직장인들에게 점심은 여유와 대화를 즐길 기회이지만 때로는 메뉴 선택이나 비용을 놓고도 고민이 따른다. 서울 도심이나 강남에서는 5000원 이하의 점심 메뉴를 찾기가 쉽지 않다. 임대료가 비싼 서울 도심의 식당에서 5000원 이하의 음식이라면 사용하는 식재료로 국산보다 중국산을 많이 쓰거나, 반찬을 재활용하는 업소일 가능성이 있다. 사원복지를 위해 운영하는 구내식당이 아니면 최소한 6000원은 기본이다. 이 때문에 공공기관이나 다른 회사의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직장인들도 적지 않다.
▷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이 ‘1일 1현장 방문’을 방침으로 불과 보름 동안 18곳의 민생 현장을 누비는 ‘광폭 행보’로 관심을 끌고 있다. 그는 최근 “5000원짜리 점심이 중도실용 친서민 정책”이라거나 “공직자 청렴도 결과를 공개하겠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불렀다. 일각에서 “요즘 칼국수도 6000원인데 비현실적인 얘기”라거나 “과욕을 부린다”는 비판도 있다. 호텔이나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와인을 곁들이면 일인당 10만 원을 훌쩍 넘는 점심 메뉴도 많다. 5000원이라는 금액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국가예산으로 점심을 하면서 너무 호화스럽게 먹지 말라는 의미라면 굳이 트집 잡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권순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