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에 울린 총성, 2000만 조선인 가슴에 더 큰 울림으로일제요인 암살- 관공서 습격독립투사들의 ‘롤모델’로안의사 일가친척 망명투쟁건국훈장 받은이만 10여명
《“모처에서 탐문한 바에 의하면 전긔(前記) 안모는 녯날 하루빈에서 일본 정객 이등박문을 총살한 안중근 씨의 친척이요 또 로국(露國)에서 평양에 드러온 이래 중화군과 기타 각디를 수차 왕래하며 동지를 규합하야 무삼 일을 계획하는 듯함으로 이미 중화경찰서에서도 그 련루자로 청년 이삼인을 검거하고….” ―동아일보 1924년 8월 4일자》일제 조선침략의 설계사였던 이토 히로부미를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저격 살해한 사건은 2000만 조선인의 가슴속에 큰 격랑을 남겼다. 일제강점기 내내 수많은 항일독립투사들이 그를 역할모델로 삼았고 일제 요인 암살이나 관공서 습격 등으로 그의 길을 따르려는 시도가 줄을 이었다.
1926년 4월 28일 독립운동가 송학선(宋學先)은 순종의 죽음을 조상(弔喪)하러 오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차량을 습격해 경성부회 의원 세 사람을 살해했다. 그러나 사이토 총독은 그 차에 타고 있지 않았다. 체포된 송 의사에 대한 일경의 취조 결과는 5월 2일 동아일보에 다음과 같이 실렸다.
세종로에 되살아난 애국혼100년 전 오늘,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 청년이 중국 하얼빈역에서 조선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외치며 일제의 화신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살해했다.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울 종로구 세종로 KT 광화문 지사는 안 의사의 왼손을 그린 대형 걸개그림을 외벽에 내걸었다. 김재명 기자
1929년 4월 25일 동아일보에는 망우리에서 우편물 운송차량을 탈취한 뒤 1주일이나 일경과 격전을 치러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공명단(共鳴團)사건 소식이 실렸다. “공명단원 세명이 경긔도 경찰부에 톄포되어 엄중취됴중이라 함은 긔보(旣報)하얏거니와 동(同)단본부단장과 뎡확한 단원수효는 아즉까지 확실치 못하나 상해지부장은 안화명(安華命)이라는 이등박문공을 하루빈에서 암살한 안중근의 재종제(再從弟·6촌 동생)라 하며 출생디는 황해도 송화인데 십여 년 전에 조선을 떠나 중국 각디는 물론이오 멀리 미주와 구라파의 독일 로서아 등 제국을 순회하며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 십여 년 전부터 경찰 측에 주목의 초y이 되였다더라.”
안 의사의 사촌 명근 씨는 안 의사 의거 이듬해인 1910년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금하다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됐다. 수많은 민족지도자가 체포돼 극심한 고문을 받았던 ‘105인 사건’의 발단이었다. 1924년 그의 석방은 전 조선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경술년 십이월 입감 이후로 꼿 피고 낙엽 지는 전후 십오개년을 경성형무소 텰창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지난 구월에 광명한 텬디에서 정든 산천과 사랑하는 동포를 보게 된 안명근 씨는 (…) 신천 시내 유지 일동은 유량한 양악을 선두로 하야 산자수명한 화산에서 다과회를 개최하려고 하얏스나 당국의 엄금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1924년 4월 15일 동아일보)라는 기사는 당시 석방된 안명근 씨에 대한 조선 사회의 기대가 한껏 높았음을 보여준다. 안 씨는 그 후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오늘날 국가보훈처가 펴낸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은 안중근 의사를 포함해 그의 일가친척으로 독립장 등 대한민국건국훈장을 받은 인물만 10여 명의 이름이 올라 있다. 동생 정근 공근 씨, 사촌 명근 경근 씨, 조카 춘생 봉생 씨 등이 그들이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100년 앞을 내다본 ‘동양평화론’▼
■ ‘동아시아 공동체’ 재조명
두 동생에 유언안중근 의사의 사형이 집행되기 전 안 의사가 동생인 정근, 공근과 홍석구 신부를 만나 유언을 하고 있는 모습. 동아일보 자료 사진
안 의사는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과 사형 집행을 앞둔 극한 상황에서 한국 중국 일본이 서로 도와 문명국가를 건설하고 동양평화를 이룩하자는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모두 다섯 부문으로 계획했지만 서문과 각론의 일부분만 쓰고 나머지 세 부문은 완성하지 못했다. 이토나 중국 이홍장의 자국 중심 동양평화론과 달리 안 의사는 칸트의 ‘영구평화론’처럼 ‘진정한 평화는 동등한 입장의 조약에서 나온다’고 주창함으로써 100년 뒤 세계화의 시대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되새겨야 할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 한국 중국 일본이 서로 평화 이룩해야
안 의사는 옥중에서 집필한 자서전 ‘안응칠의 역사’(응칠은 안 의사의 아명)와 ‘동양정책-동양평화론’, 법정진술 등에서 자신의 의거는 동양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에서 출발했다고 분명히 밝혔다. 하얼빈 의거를 ‘동양평화를 위한 의전(義戰)’으로 규정한 그는 뤼순감옥 수감 중 일본 관헌에게 전한 ‘안응칠의 소회’에서 “하얼빈에서 총 한 발로 만인이 보는 앞에서 늙은 도적 이토의 죄악을 성토하여 뜻있는 동양 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라고 밝혔다.
안 의사는 △뤼순 지역에 한중일이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한 뒤 인도 태국 등 여러 아시아 국가가 참여하는 회의로 발전시켜 나가자 △한중일 삼국이 참여하는 공동 금융기구를 설치해 운영하자 △한중일 삼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을 만들어 삼국 청년들로 하여금 군단을 편성해 지키게 하자는 구체적인 구상도 밝혔다. 공동 금융기구 계획은 유럽연합(EU) 구상보다 최소 70여 년을 앞서는 진보적 구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 “이익 공동체와는 차원 다른 구상”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26일 중국 다롄대에서 열리는 학술대회에서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본 안중근과 동양평화론’을 발표한다. 그는 “당시 나온 동아시아 구상의 대부분은 입으로 동아시아의 연대와 단결을 외치면서도 자신의 민족과 국가를 우선하는 폐쇄적인 성격을 가졌지만 이와 달리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보편 세계로의 지향을 가진 열린 민족주의에 근거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서울-하얼빈서 오늘 ‘영웅’을 기린다
기념식 등 국내외행사 다채▼
안중근 의거 100주년을 맞아 그의 민족혼과 동양평화 사상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국내외에서 열린다.
26일 중국 하얼빈 시 조선민족예술관에서는 한국 독립기념관이 하얼빈 시의 도움으로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식을 연다. 기념상영물 상영, 유시 낭독, 동상제막식 등이 이어진다.
서울에서는 오전 10시 서울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앞 광장에서 정부 주요 인사와 안 의사 유족 등 1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을 거행한다.
천주교 다롄 한인 성당을 중심으로 한 한중일 천주교인들은 안중근 의거 100주년을 맞아 묵주기도를 인터넷 카페(cafe.daum.net/tianzhujiaotang) 댓글 형식으로 봉헌하는 ‘묵주기도 100만 단(段) 바치기’ 운동을 내년 3월 26일까지 벌인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